[조성하 전문기자의 그림엽서]‘설국’의 여인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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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설국’의 무대인 일본 니가타 현 유자와의 홍등가 ‘도요타야’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게이샤 고마코. 유자와의 설국기념관에서 구입한 그림엽서. 후나미즈 노리오 작.
소설 ‘설국’의 무대인 일본 니가타 현 유자와의 홍등가 ‘도요타야’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게이샤 고마코. 유자와의 설국기념관에서 구입한 그림엽서. 후나미즈 노리오 작.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1968년 일본에 최초의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1899∼1972)의 소설 ‘설국(雪國·유키구니)’의 첫머리입니다. 이 글은 설국의 무대이자 가와바타가 4년 가까이 집필을 위해 체류했던 ‘진짜 설국’에서 보내는 것입니다. 눈 많이 내리고 좋은 술 많기로 이름난 니가타 현, 거기서도 에치고 산맥의 산중 온천마을 유자와(湯澤) 정입니다.

눈 고장 유자와는 스키장과 온천으로 이름난 휴양지입니다. 마운트나에바 갈라유자와 같은 스키장은 한국스키어에게도 잘 알려진 곳입니다. 그런 유자와의 명성과 인기는 가와바타가 소설을 쓰던 1930년대 중반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아시겠지만 스키와 온천은 찰떡궁합입니다. 온종일 스키를 탄 후 노천탕에 몸을 담갔을 때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다 별별 음식을 두루 차려내는 가이세키 요리를 지자케(地酒·그 지역의 술)와 곁들여 마시는 즐거움이란…. 호사도 이런 호사가 없습니다.

그런 유자와에 스키장이 생긴 건 1921년입니다. 하지만 당시 스키를 즐긴 것은 주민들뿐이었습니다. 도쿄 같은 대도시에선 언감생심이었죠. 대중교통 수단, 즉 철도가 없어서지요. 하지만 그 문제가 해결되는 데는 10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1931년 도쿄∼니가타 조에쓰센(上越線) 철도가 개통된 겁니다. 덕분에 도회지 사람들도 기차로 유자와에서 스키와 온천을 즐기게 됐습니다. 소설 ‘설국’은 바로 그 당시의 유자와가 배경입니다.

이 철도를 스키어만을 위해 만든 건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스키관광을 염두에 둔 것도 분명합니다. 6년 뒤 유럽관광객을 유치할 목적으로 묘코고원(니가타 현)에 스키장을 만들고 그 슬로프 중턱에 알프스산장풍의 아카쿠라 관광호텔을 개관한 게 증거입니다. 1931년은 일본이 만주사변으로 대륙침탈에 시동을 건 해입니다. 중국을 집어삼킬 전쟁을 일으켰다 함은 그럴 만한 국부가 축적됐음을 말함이고, 그건 한겨울에 스키를 즐길 만한 여유도 있었음을 말합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온천료칸(여관) 다카한(高半)의 ‘가스미노 마(안개의 방)’라는 객실에 근 4년을 머뭅니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소설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짐을 느낍니다. 주인공 시마무라(島村) 역시 한겨울 설국으로 변한 유자와를 기차로 찾아와 료칸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돈을 주고 곁에 둔 게이샤(기생) 고마코(駒子)에 대한 연민과 애수가 소설의 큰 기둥을 이루는데, 가와바타의 옆에도 수발을 들어준 마쓰에(松榮)라는 게이샤가 있었습니다.

그림엽서의 제목은 ‘고마코’입니다. 그러니 그림 속 여인은 고마코겠지요. 그렇지만 이 방은 소설 속 고마코의 방이 아닙니다. 실존인물 마쓰에가 료칸 손님의 부름을 기다리던 도요타야(豊田屋)의 대기실입니다. 그러니 소설 속 고마코가 마쓰에의 몸을 빌려 현실로 나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거울은 ‘설국’에서 작가가 인간심리를 비춰보는 핵심 오브제입니다. 그걸 잘 아는 화가도 거울 앞 마쓰에와 거울 속 고마코를 한 화면에 등장시킴으로써 현실과 소설 속 경계를 허물려고 한 것일까요. 가와바타로부터 사랑과 연민을 받았을 두 여인을 동시에 떠올리며….

저는 작가가 설국 유자와를 눈 쌓인 겨울, 그것도 한밤중에 기차로 찾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는 절묘한 표현이 작가적 상상력만으로 가능하지 않을 거란 생각에서지요. 그래서 첫 구절의 ‘긴 터널’을 찾아가 봤습니다. 유자와 시내에서 10km쯤 떨어진 시미즈(淸水) 터널입니다. ‘신호소’는 터널을 빠져나오면 처음 만나는 쓰치타루(土樽) 역입니다. 소설에서 요코(葉子)가 차창 밖의 역장과 담소하는 곳입니다. 역무원도 없는 이 간이역은 역사(驛舍)와 주차공간만 빼고 주변이 온통 눈에 덮여 있었습니다. 아마 겨울 내내 이렇게 눈에 파묻혀 있을 것 같았습니다. 기차가 터널을 나서면 곧바로 단선철교를 건넙니다. 개통 땐 철교도 터널도 하나였지만 지금은 쌍다리에 쌍굴입니다. 복선전철화 결과입니다.

혹시 니가타를 찾으시거든 신칸센 말고 보통열차를 타시기 바랍니다. 그것도 한겨울 한밤중이면 더 좋겠지요. 그래야 ‘설국’에 사람 냄새를 입혔던 고마코의 애련한 숨소리가 들려올지도 모르니….

조성하 전문기자 summ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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