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세계수학자대회 유치 주역 박형주 조직위원장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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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올림픽 우리라고 왜 못치르나… 그 오기가 나를 이끈 동력”

세계수학자대회를 위해 세계 곳곳을 방문하다 보니 어느덧 여행가방 싸는 데는 달인 수준이라는 박형주 조직위원장. 그는 8월 한국에서 열리는 세계수학자대회가 한국 수학을 세계 10위권에 진입시키는 중요한 기회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김인규 동아사이언스 기자 imagemob@donga.com
세계수학자대회를 위해 세계 곳곳을 방문하다 보니 어느덧 여행가방 싸는 데는 달인 수준이라는 박형주 조직위원장. 그는 8월 한국에서 열리는 세계수학자대회가 한국 수학을 세계 10위권에 진입시키는 중요한 기회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김인규 동아사이언스 기자 imagemob@donga.com
22만5000km…. 지구 다섯 바퀴 반….

8월 한국에서 열리는 지구촌 최대 수학 올림픽 ‘세계수학자대회(ICM)’ 박형주 조직위원장(49·포스텍 수학과 교수)이 지난해 ICM을 홍보하기 위해 비행기로 세계 곳곳을 누빈 거리다.

13일 ‘한국수학의 해’를 선포한 다음 날에도 미국 볼티모어 출국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를 인천국제공항에서 만났다. 이른 아침이어서 “간단한 식사라도 하자” 했더니 “중요한 일이 있을 땐 잘 안 먹는다. ‘한국수학의 해’ 선포식과 포럼 진행 때문에 어제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다”고 했다. 기자가 짐짓 놀라자 그는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잘하는 게 하나 있다. 어떤 것에 몰입하면 사흘 정도는 안 먹고 안 잘 수 있다”고 한술 더 떴다. 여행객이 오가는 공항 커피숍에서 그와 마주앉았다.

학문 중 가장 오래된 학술대회

‘세계수학자대회’ 소개 이야기로 말머리를 삼았다.

“19세기 말부터 시작되었으니 모든 학문 분야를 통틀어 가장 오래된 학술대회라 할 수 있다. 개막식에서는 개최국 국가원수가 수학 분야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상을 수여하는데 수학자들을 정말 흥분시키는 것은 대회의 여러 강연에서 제시되는 추론이다.”

―추론이라면 일종의 가설 아닌가.

“수학자들이 풀어야 할 난제들이 도출되는 장(場)이라고 보면 된다. 세계적인 수학자들이 모여 ‘이 수학적 난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이럴 것’이라는 추론을 저마다 내놓는 것이다. 이게 학자들의 심장을 뛰게 만든다. 세계수학자대회는 수학의 역사 그 자체다. 1900년 파리에서 열린 제2회 대회에서 다비드 힐베르트라는 수학자가 그때까지 학계에서 풀리지 않았던 난제 23개를 제시했는데 이후 17개가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풀렸다. 힐베르트가 제시한 문제의 의미를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한 과정이 곧 20세기 수학의 역사라고 할 수도 있다.”

전문적인 수학이야기가 나오자 그를 만나면 제일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이 튀어나왔다.

―수학계의 오랜 난제를 풀었다 해서 일반 대중의 삶이 변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박 교수는 빙그레 미소를 띤 뒤 말을 이었다.

“350년 이상 수학자들을 괴롭힌 난제인 페르마의 마지막 문제가 1994년 앤드루 와일스에 의해 해결됐다. 와일스가 페르마의 문제를 푸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이론이 바로 타원곡선이론이다. 이 이론은 현재 모든 인터넷 상거래 암호에 쓰이고 있다. 현재 널리 쓰이는 교통카드에도 수학의 비밀이 숨어있다. 카드는 단말기에 대면 바로 정보가 읽히기 쉽게 만들어야 하는데 정보가 쉽게 판독되도록 하는 것과 보안 문제는 모순관계에 있다. 다시 말해 보안을 위해 암호를 복잡하게 만들면 해독이 어려워지는 단점이 생긴다.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와일스의 타원곡선이론이다. 이처럼 수학자들을 홀리는 난제들은 그저 그들의 관심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술의 견인차 역할을 한다.”

e거래-보험상품-카드에도 수학적용

그가 물 한 모금을 삼키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최적의 인재를 뽑고 싶어 하는 회사가 자기가 일하고 싶어 하는 사원들의 교육과 재배치에 드는 비용을 최소화하는 데에도 수학의 짝짓기 이론이 적용된다. 짝짓기 이론을 입증한 수학자 로이드 섀플리는 2012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요즘 범죄수사에서는 폐쇄회로(CC)TV에 잡힌 범인 이미지를 기존 데이터베이스에 있는 수백만 개의 사진들과 비교해 잡아내는데 여기에도 수학이 적용된다. 범인 이미지와 비슷한 사진을 빨리 찾기 위해서는 비교하는 이미지의 정보량을 낮춰야 하는데 여기서 사용하는 방법이 미분기하학과 선형대수 이론이다. 수학은 이제 수학을 전공하는 사람만의 관심사가 아니다. 신용카드를 쓸 때, 이동통신사의 요금제나 보험 상품을 선택할 때, 병원에서 자기공명영상(MRI)을 촬영할 때에도 모두 수학이 적용된다.”

한국 수학수준 상위 두번째 그룹

―우리나라 수학 연구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국제수학연맹은 각국 수학 수준을 논문 수로 평가해 1그룹부터 최상위인 5그룹까지 구분하는데 현재 우리는 4그룹에 속해 있다.”

1981년 2그룹이었던 우리가 두 계단이나 껑충 뛰기까지에는 박 교수의 공이 컸다.

“대한수학회 국제이사 시절 10년간 발행된 수학 저널 수백 권에서 저자 주소가 ‘KOREA’라고 되어 있는 논문을 며칠 밤을 새워가며 모두 세었다. 3그룹과 4그룹에 속한 나라 논문 수도 같은 방법으로 모두 세었다. 그런데 결과가 기대 이상이었다. 우리 수준이 4그룹에서도 상위권이었던 것이다. 이 데이터를 국제수학연맹에 알렸고 연맹은 2그룹 상향 조정을 해 주었다. 이는 유례가 없던 일이었다.”

박 교수는 이번 대회 유치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번 대회에서 우리나라 수학자로는 처음 기조 강연을 하는 황준묵 고등과학원 교수(50)는 “언젠가는 한국도 대회 주최국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가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개최할 수 있었던 것은 박 교수의 창의적인 전략과 헌신적인 노력 때문”이라고 했다.

―왜 대회를 꼭 한국에서 치러야 한다고 생각했나.

“2007년 6월 4그룹 진입을 자축하는 자리에서 우리도 대회 한번 열어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당시만 해도 쉽지 않을 거라는 분위기가 팽배했는데 그런 반응들을 보면서 이상하게 오기가 생겼다. ‘우리라고 못할 이유는 뭐냐?’ 했더니 사람들이 ‘그럼 당신이 한 번 나서 보라’고 했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순간이었다(웃음).”

박 교수는 모든 것을 수치화하는 수학자답게(?) 국내 모든 대학에 일일이 전화를 걸어 국내에서 열린 모든 국제학회를 조사해 현황을 그래프로 만든 뒤 “대내외적으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한국이 국제 학술대회 유치에 소극적이어서야 되겠느냐”며 설득에 나섰다.

그는 이번 대회가 한국 수학자들의 변방의식을 깨는 출발점이 되리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다.

“2002년 월드컵을 보고 자란 기성용, 이청용 선수가 세계무대를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데뷔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번 대회를 계기로 후배들도 세계 수학자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으면 좋겠다.”

국제수학계, 한국 보는 시선 달라져

실제로 중국 수학계가 2002년 대회 유치 이후 논문 수가 70% 이상 증가하면서 세계 2위 수학 대국이 됐고, 스페인도 2006년 개최 이후 10위권 진입에 성공한 뒤 현재 7위의 수학강국이 됐다.

“때로 지치고 회의에 빠져있다가도 뭔가 작은 차이나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음이 느껴질 때 마술처럼 다시 힘을 되찾곤 한다. 지난 5년여 동안 국제 수학계가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 우리 사회에서 수학이 기여하는 역할에 대한 이해가 많이 변했다. 과거에는 외국의 저명한 수학자에게 초청 메시지를 보내도 시큰둥했는데, 이제는 모두 한순간의 머뭇거림도 없이 수락하고 있다. 요즘 각 대학 수학과에 우수한 인재들이 몰리고, 국제수학올림피아드 수상자 중 60% 이상이 수학을 전공하겠다고 한다. 게다가 ‘수학동아’ 같은 청소년 수학 잡지가 인기 있는 것을 보면 이 모든 게 변화가 아니고 무엇이겠나.”

:: 세계수학자대회(ICM) ::

국제수학연맹(IMU)이 주최하며 1897년 스위스 취리히 대회를 시작으로 4년마다 열리는 기초과학 최대의 학술대회다. 매회 5000명 이상의 수학자가 참가하는 ICM에서는 수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상을 개막식에서 수여한다. 수상자는 대회 때까지 비밀에 부쳐지는 서프라이즈 이벤트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으며, 개최국의 국가원수가 직접 수여한다. 올해는 8월 13일부터 9일간 한국에서 열리며 100여 개국 6000여 명의 국내외 수학자들이 참여한다. 아시아에서는 1990년 일본 교토, 2002년 중국 베이징, 2010년 인도 하이데라바드에 이어 네 번째다. 이번 대회에서는 자신이 연구한 수학모델을 적용한 투자 프로그램으로 큰 수익을 올려 3조 원이 넘는 연봉을 받아 유명해진 르네상스 테크놀로지 최고경영자(CEO) 제임스 사이먼스의 강연도 준비되어 있어 벌써부터 관심이 뜨겁다.

▼ 박형주 교수는

1986년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

1995년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수학 박사

2004∼2009년 고등과학원 전자계산학부 교수

2009년∼ 포스텍 수학과 교수

연구분야 계산대수기하학, 신호처리 및 정보처리

인터뷰=장경애 동아사이언스 기자 kaj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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