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212>장소들, 사랑하는 사람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24일 03시 00분


코멘트
장소들, 사랑하는 사람들
―필립 라킨(1922∼1985)

아니, 난 한 번도 찾지 못했다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장소를
이곳이 내게 적당한 곳이야,
여기 머물러야겠어 나는;
또한 한 번도 만난 적 없다
그 즉시 주고 싶은 사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이름까지도 주고 싶은 사람을;

찾았다면 그게 증명인 듯해
우리가 선택권을 바라지 않는다는, 어디에
지을지, 아니면 누굴 사랑할지에 대해서 말이지;
그냥 데리고
가달라는 거지 변경할 수 없게,
그러므로 우리 탓 아니라는 거지
설령 읍이 따분해진단들,
처녀가 멍청이 된단들.

하지만, 그들을 놓쳤으니, 우린
어쩔 수 없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동하는 거야
마치 우리가 정착했던 이유가
우리를 으깨버렸다는 듯이, 사실은;
그리고 더 현명하지 그런 생각일랑
접어두는 게, 우리가 아직도 추적할 수 있다는 생각,
이날까지 부르지 않은
그 사람, 그곳을 말이지.


서른이 넘도록 결혼하지 않으면 주위 사람들은 마치 자기들 권리이며 의무인 양 결혼을 시키려고 애쓴다. 그 사람 얼굴만 보면 ‘결혼’이 떠오르는 모양이다. 친척어른 칠순잔치에 갔던 날 생각이 난다. 뷔페식당 로비에서 오랜만에 뵌 숙모님이 나를 붙들고 큰소리로 말씀하셨다. “인숙아, 시집 좀 가라! 사람은 한 번은 결혼을 해야 하는 거다!” 내 나이 마흔 중반을 넘길 때였다. 나는 누가 들을까 민망해서 얼른 주위를 둘러봤다.

영국도 그리 사정이 다르지 않을 테다. 결혼을 이 세상에 안착하는 닻이라 여겨 미혼남녀를 근심할 테다. 노총각일 화자는 그에 답한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주고 싶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고, 아니 만났더라도 선택하지 못했다고. 선택하면 책임져야 한다. 거기 머물러야 한다. 화자는 어떤 장소에도 어떤 사람에도 머무르지 못하는 체질이다. 하지만 그 처녀가 나를 ‘그냥 데리고’ 갔으면 그냥 살았을 거란다. ‘설령 읍이 따분해진단들/처녀가 멍청이 된단들’ 변경하지 못했을 거란다. 그거 참, 살아보기도 전에 따분해지고 여자는 멍청하기 마련이라 생각하다니. 필립 라킨은 도서관 사서로 일하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잘했네!

황인숙 시인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