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영의 따뜻한 동행]백 살의 꿈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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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가을에 미당 서정주 선생 생가를 다녀왔다. 미당 선생의 동생 우하(又下) 서정태 시인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미당 선생이야 천하가 다 아는 위대한 시인이지만 동생도 시인인 줄은 작년 봄에야 세상에 알려졌다. 형님에 대한 중압감 때문이었는지 첫 시집을 내고 오랜 세월 침묵해오다가 91세에 두 번째 시집을 내어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다.

그 시집의 제목 ‘그냥 덮어둘 일이지’는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 하는 독백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타고난 시심을 그냥 덮어둘 수만은 없어 뒤늦은 나이에 시집을 내고, 비로소 시인의 이름으로 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분은 미당 생가(물론 자신의 생가이기도 하지만) 옆에 ‘우하정’이라는 작은 집을 짓고 홀로 기거하며 시를 쓰고 있다.

“마당에 앉아 있으면 다람쥐가 쪼르르 내 발밑까지 다가와서 나를 빤히 올려다봐. 짐승들도 저를 해코지할지 아닐지 아는 것 같아. 내게서 독기가 다 빠진 게지. 요즘 시를 쓰면서 이제야 인생을 제대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서정태 시인의 얼굴에는 생기가 가득했다. 95세 전에 세 번째 시집을 내기 위하여 열심히 시를 쓰고 있다면서 시의 일부를 읽어주며 즐거운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까지 산 것은 다 헛것이었고 지금부터가 제대로 사는 것이라고 말하는 서정태 시인. 바쁘고 고단했던 젊은 날을 뒤로 하고 구십이 되어서야 평생 간직해온 꿈을 이루어가고 있는 시인을 보면서 인생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님을 실감했다.

사실 자신이 원했던 삶을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어렸을 적에는 잘 몰라서, 어른이 되어서는 사는 게 다 그런 것인 줄 알고 살았다. 그러다 50대에 이르면 한 번쯤 뒤를 돌아보며 방황한다. 좋은 시절 다 보내고 내게 남은 것이 무엇인지 묻게 된다. 과연 좋은 시절은 다 가버린 걸까?

이제는 백세시대다. 태어나서 30년은 성장기였고, 그 후 30년은 열심히 일했다면, 마지막 30년은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선택해도 좋은 자유로운 나의 시간이다. 사는 동안 잠시 잊었을지라도 가슴속에 묻어 둔 꿈이 있다면, 서정태 시인처럼 그냥 덮어두지 말고 꺼내자. 백 살에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은 백세시대가 주는 보너스다. 우리에게는 아직 꿈을 이룰 시간이 남아 있다.

윤세영 수필가
#미당 서정주#서정태 시인#그냥 덮어둘 일이지#꿈#백세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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