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회식” 부대장의 깜짝 통보에 여군 金중위는 가슴이 철렁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1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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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여성시대]2부 전문직<10>군인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단 한 사람도 열외는 없습니다.”

A 중위는 부대장의 갑작스러운 회식 통보에 서둘러 개인 저녁 약속을 취소했다. 부대장 주관의 회식에서 불참은 용납되지 않았다. 술이 서너 순배 돌자 참석자들은 홍일점이었던 A 중위에게 술 돌리기를 권했다. 분위기에 맞춰 술잔을 돌리려던 그의 뒤통수로 B 중령의 말이 날카로운 비수처럼 꽂혔다. “술은 역시 여자가 따라야 제맛이지. 잘 한번 제조해 봐.”

이전에도 몇 차례 야한 농담을 건네며 A 중위를 당혹스럽게 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지금은 전역을 한 A 씨에게 그날의 회식 건은 항상 가슴 한구석에 깊은 상처로 남아 있다. A 씨는 “비단 그 일만이 아니었다. 선배나 동기는 물론이고 후배들조차 나를 ‘군인’이 아니라 ‘여자’로 보는 것이 너무 부담스러웠다”고 토로했다.

많은 여성 군인이 회식 자리에서 이 같은 일을 한두 번씩은 경험했다고 한다. ‘여자가 시집이나 가지 왜 군대에 왔느냐’ ‘화장은 당연한 에티켓’이란 식으로 여자를 무시하거나 성차별적 발언을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고 토로했다. 추행이나 성폭행으로 이어지는 일도 적지 않다. 이러니 정작 언론 등을 통해 외부로 공개되는 것은 빙산의 일각이다. ‘부대 명예를 실추시킨다’ ‘피해자를 위해서라도 사건이 외부로 알려지면 곤란하다’는 이유로 조용하게 처리하려는 경향 때문이다.

이런 탓에 성 관련 사고가 발생하면 군대는 축소·은폐 논란에 휩싸이기 일쑤다. 올해 4월 육군사관학교에서 여생도 성폭행이란 사상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육사는 1주일가량을 쉬쉬했다. 언론에 보도되고 나서야 군 당국은 공식적으로 조사에 들어갔다. 군 관계자는 “군의 특성상 군에서 일어나는 일이 외부로 알려지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며 “육사 사건도 언론 보도가 없었으면 자체 조사로 조용히 처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 軍이라는 특수성

남성 군인들은 군대 내에서 발생하는 성범죄 관련 사건을 어느 조직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로 군에서만 발생하는 특수한 사건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 남성 장교는 “군부대가 지방, 그것도 오지에 있는 경우가 많아 외부인을 접할 기회가 적고 군대 내에서 계속 얼굴을 맞대다 보니 여군을 이성으로 느껴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영관급 남성 장교는 “성범죄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남성 군인을 잠재적 성범죄자로 보는 시각은 올바르지 못하다. 개인 문제를 조직 전체 문제로 여론을 호도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군대 성범죄가 단순히 욕정의 문제가 아니라고 반박한다. 엄격한 상명하복의 위계질서가 존재하는 군대에서 계급은 곧 권력이라는 것이다. 여군에 대한 성 군기 사건도 결국 권력의 문제라는 얘기다. 최근 강원 화천군 육군 모 부대 인근에서 자살한 오모 대위(28·여) 사건의 경우 권력에 의한 성 착취를 여실히 드러냈다. 노모 소령(36)은 오 대위가 자신의 성관계 요구를 거절하자 상관이란 직책을 이용해 10개월 동안 언어폭력, 성추행, 야근 등으로 오 대위를 괴롭힌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군 간부의 권력 피라미드에서 최하위층에 놓여 있는 여군 부사관들은 더욱 열악한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군대 내에서는 20대 초반의 젊은 여군 부사관을 남성 장교들이나 상급 부사관들이 계급을 앞세워 겁박한 사례가 적지 않다. 장성들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해 3월 특전사령관이 여군 부사관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일로 보직 해임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이 발생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또 다른 장성이 자신의 부대에 근무하는 여군 하사를 노래방에서 성추행한 혐의로 군 당국의 조사를 받았다.

○ 여전한 솜방망이 처벌

국방부도 사안의 심각성을 느끼고 ‘성 군기 예방지침’ 등을 마련해 일선 부대에서 성범죄 예방 교육을 시키고 있다. 이 지침에는 △남녀 군인 및 군무원의 신체 접촉은 악수만 가능하다 △남녀 군인 및 군무원 2명만 사무실에 있을 때는 반드시 출입문을 열어놓아야 한다 △회식 자리에서 2차 참여를 강요하지 않는다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최근에는 김관진 국방부 장관 주관으로 대규모 성폭력 예방 직장교육을 실시했다.

그럼에도 군대 내 성범죄 발생률이 좀처럼 줄지 않고 있는 데 대해 성범죄 조사가 형식적이고 처벌이 가볍기 때문이란 지적도 제기된다.

서영교 민주당 의원이 10월 국정감사에서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09년부터 2013년 6월 말까지 여군이 피해자인 성 관련 범죄는 총 61건. 군별로는 육군이 40건(65.6%), 공군이 10건(16.4%), 해군이 9건(14.8%), 국방부 2건(3.3%)이었다. 특히 해군은 여군을 대상으로 한 범죄 9건 모두 성 관련 범죄인 것으로 드러났다. 문제는 실형률이 매우 낮다는 것이다. 61건의 성 관련 범죄 중 단 3건(4.92%)에 대해서만 실형이 내려진 것으로 밝혀졌다. 반면에 기소유예, 선고유예, 공소권 없음, 혐의 없음, 죄가 없음 등으로 죄를 묻지 않은 경우는 39건(63.9%)에 이르렀다.

여군들의 고충은 성범죄만이 아니다. 대다수 여군은 육아와 출산을 앞두고 진로의 고민에 빠지게 된다. 잦은 근무 이동 때문에 한곳에 정착하기 어렵고 훈련, 야근 등에 치여 제대로 자녀를 돌보지 못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군인들 사이에선 ‘남편은 경상도, 아내는 강원도, 자녀는 서울에 있는 이산가족’이란 웃지 못할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다.

최근 육아휴직을 택하는 여군이 늘었지만 여전히 쉽지 않은 선택이다. 육아휴직을 했던 한 여군은 “마지막 순간까지 진급에 불이익은 받지 않을까, 차후 보직을 받을 때 이런 것들이 반영되는 것은 아닐까 고민을 많이 했다”고 털어났다. ‘군대의 꽃’이란 지휘관으로까지 성장하는 여군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간호 등 일부 병과에서 장성이 배출되기도 했지만 전투 병과를 받고 병사들을 직접 지휘하는 대대장급 이상의 여군은 여전히 드문 게 현실이다. 그나마 이들도 실제 전투대대를 맡기보다는 신병교육대대에 배치되기 일쑤다. 군 관계자는 “여군들은 지휘관의 참모나 담당 분야의 실무진으로 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라며 “아직까지 지휘관으로서의 여군을 못미더워하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손영일 정치부 기자 scud2007@donga.com


#군인#여군#성범죄#성폭행#육아#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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