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경제로 가는 길]<9>실패하라, 그래야 성공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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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가 밑천” 이스라엘선 7전8기 창업 흔한 일

텔아비브의 한 벤처 액셀러레이터(육성전문기업) 사무실에서 창업가들이 사업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다. 대부분은 창업에 성공하거나 실패한 뒤에도 또다시 창업에 도전하는 연쇄 창업가들이다. 텔아비브=김용석 기자 nex@donga.com
텔아비브의 한 벤처 액셀러레이터(육성전문기업) 사무실에서 창업가들이 사업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다. 대부분은 창업에 성공하거나 실패한 뒤에도 또다시 창업에 도전하는 연쇄 창업가들이다. 텔아비브=김용석 기자 nex@donga.com
4년 전 중소기업청이 주관한 창업경진대회에서 장려상을 받은 김명호(가명·29) 씨는 아직도 창업에 나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가상현실 기술을 응용한 사업 아이디어로 상을 받은 뒤 여러 기업의 ‘러브 콜’을 받을 때만 해도 당장 창업해 큰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갈수록 창업은 머나먼 남의 얘기가 돼 갔다. 김 씨는 몇 년 뒤 한 중소기업에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취업했다.

“창업이라는 게 특허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더군요. 기업이 요구하는 시제품을 만들려면 돈이 필요했습니다. 투자를 받지 못해 돈을 빌려 회사를 세우려니 실패에 대한 부담이 컸습니다. 창업을 함께 준비하던 동료들이 하나 둘 취직했고, 가족들의 걱정에 저도 취직할 수밖에 없었죠.”

○ 창업 가로막는 두려움

본보는 이 대회의 2008년과 2009년 수상자 57명 가운데 연락이 닿는 24명을 대상으로 현재 상황을 조사해 봤다. 대회에 출전할 때는 하나같이 창업을 꿈꿨지만 김 씨처럼 아예 발을 들이지도 못한 사람이 절반이 넘는 13명(54%)에 달했다.

이들은 창업에 도전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위험 부담이 커서”, “투자를 받지 못해서”라고 답했다. 우여곡절 끝에 창업한 나머지 11명도 회사를 세우고 키우는 과정에서 보증 등 부담은 점점 더 커졌고, 정부의 지원은 줄어들었다는 공통된 경험을 토로했다. 창업에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실패의 부담이 얼마나 큰 지 알아보기 위해 중소기업진흥공단이 운영하는 청년창업사관학교를 거쳐 창업한 41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창업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있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73%가 “그렇다”고 했다.

‘창업국가’로 불리며 한국 창조경제의 모델로 불리는 이스라엘의 창업가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이스라엘은 동아일보와 베인앤컴퍼니가 함께 만든 동아·베인 창조경제지수(DBCE)에서 ‘성공과 실패의 선순환 시스템’ 분야 3위에 오른 국가다. 한국은 이 분야에서 28위에 그쳤다.

4월 16∼18일 이스라엘 텔아비브를 방문해 만난 10여 명의 창업가에게 창업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있느냐고 물었다. 한국보다는 적었지만 44%가 “그렇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한국이나 이스라엘이나 창업가들에게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극복해야 할 크나큰 관문인 것이다.

○ 실패에 대한 생각 달라

그렇다면 이스라엘 창업가들은 어떻게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고 창업에 나서는 것일까.

차이는 ‘용기’가 아니라 ‘실패에 대한 생각’에 있었다. 그들이 특별히 용감한 게 아니라는 얘기다. 한국의 창업가들은 대체로 ‘사업을 하다 실패해 빚을 지게 되는 것’을 실패라고 봤다. 청년기에 이런 일을 겪으면 재기하기 어렵다. 반면 이스라엘 창업가들은 ‘창업 아이디어를 제안했다가 투자를 유치하지 못한 것’을 실패라고 생각했다. 이런 차이는 엄청나게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컴퓨터 보안 회사 엑스팬디온을 창업한 모시 팬저 씨는 “이스라엘에선 투자로 돈을 모으지 못하거나 회사를 팔지 못하는 게 실패”라며 “실패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다음 도전을 위한 귀중한 경험”이라고 말했다. 그는 “회사 문을 닫는 것은 비즈니스에서 항상 일어나는 일”이라며 “회사가 망해도 투자자들이 각자 지분만큼만 책임지기 때문에 한국처럼 창업가가 부도의 책임을 뒤집어쓰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기업이 망했을 때 이를 처리하는 행정 시스템은 오히려 한국이 앞섰다. 월드뱅크에 따르면 파산 기업을 처분해 채권 채무관계를 정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이스라엘이 평균 4년, 한국이 1.5년으로 한국이 앞선다. 월드뱅크는 기업 파산과 관련된 행정절차의 경쟁력에서 한국을 185개국 중 14위로, 이스라엘을 47위로 평가했다.

하지만 창업국가의 성공은 행정 시스템이 아니라 생태계에서 비롯됐다. 텔아비브에서 만난 34세의 창업가 이세이 그린 씨는 25세 때 창업가의 길로 들어서 6개째 회사를 만들었다. 첫 번째 만든 보안회사를 보안 분야 세계 1위 기업인 맥아피에 약 15억 원에 팔아넘겨 성공을 거둔 그는 그 뒤 5번의 실패를 했다. 왜 첫 회사를 경영하지 않고 계속 창업을 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나는 창업가이지 경영자가 아니다”라며 “아이디어를 만들어 파는 것이 나의 일”이라고 답했다.

‘연쇄 창업가’인 그린 씨가 이런 도전을 계속할 수 있었던 비결은 투자자들이 채권자가 아닌 주주(share holder)로 참여해 실패의 부담을 나눠주는 문화와 세계 2위 수준인 벤처캐피털 펀드 조달 규모 등 벤처 생태계에서 나왔다. 김영태 주이스라엘 대사관 산업관은 “투자자를 찾기 쉬운 창업 환경과 창업가에게 담보나 필요 이상의 책임을 요구하지 않는 창업 생태계가 이스라엘을 창업국가로 만든 원동력”이라며 “선순환 시스템의 열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 창조경제는 실패 속에서 태어난다

미국의 창업지원 벤처인 유누들의 샌프란시스코 사무실에는 ‘실패하라(make mistakes)’는 문구가 큼지막하게 붙어 있다. 레베카 황 유누들 대표는 “실수나 실패를 해도 괜찮다는 의미”라며 “빨리 실패를 경험한 뒤 재도전하는 실패의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 번에 완벽한 것을 만들려 하지 말고 빨리 만들어서 실패하는 과정을 거듭하는 것이 창조적인 결과물을 내놓는 방법이라는 얘기다. ‘노키아의 나라’에서 스타트업의 나라로 변신하고 있는 핀란드의 성장 원동력도 역설적으로 노키아의 실패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최근 우리 정부가 발표한 벤처 육성 정책도 벤처 지원 방식을 ‘융자가 아닌 투자’로 전환하면서 의미 있는 혁신을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현장에선 ‘창조를 위한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안문석 고려대 명예교수는 “창조경제를 한다면서 특허 개수로 연구성과를 평가하고 고용 실적으로 기업을 평가하는 것은 과거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현대원 서강대 교수는 “공부를 잘 하면 의대에 보내고, 실패나 낙오를 허용하지 않는 과거 패러다임에선 경제가 성장해도 국민이 행복을 느끼기 어렵다”며 “개인이 꿈을 위해 도전하며 삶의 질을 높이는 경제 생태계가 창조경제의 지향점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텔아비브=김용석 기자 nex@donga.com

샌프란시스코=염희진 기자 salthj@dogna.com
#창조경제#이스라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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