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또 하나의 油戰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2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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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에너지 원유사업부 트레이더들의 24시


“신 대리는 현재 시각 선박 운항스케줄을 모조리 파악해 보고하세요. 김 과장은 주변에 대기 중인 유조선들이 당장 선적할 수 있도록 조치하세요.”

지난달 9일 SK에너지 원유사업부 원유시스템트레이딩팀이 이른 아침부터 비상회의를 소집했다. 아랍에미리트(UAE)에서 원유 선적을 기다리던 초대형원유운반선(VLCC) 선사 측에서 “폭설로 항만 시설이 마비되면서 항구가 폐쇄돼 선적이 최소한 사흘은 지연될 것”이라고 알려왔기 때문이다. 뒤이어 이라크와 사우디아라비아의 항구들도 잇따라 폐쇄됐다. 이대로 가면 원유 수급에 심각한 차질이 빚어질 게 뻔했다. 대체물량 확보가 시급했다. 싱가포르와 두바이 지사에서는 현지 확보물량 규모를 실시간으로 알려왔고, 한국 본사에선 동남아시아, 러시아의 딜러들에게 SOS를 쳤다.

○ 돌발변수와 싸우는 사람들

SK에너지 원유시스템트레이딩팀의 김정환 과장(오른쪽)과 신현 대리가 13일 중동 정세에 관한 보고서와 국제유가 등락을 함께 살펴보고 있다. SK에너지 제공
SK에너지 원유시스템트레이딩팀의 김정환 과장(오른쪽)과 신현 대리가 13일 중동 정세에 관한 보고서와 국제유가 등락을 함께 살펴보고 있다. SK에너지 제공
김정환 SK에너지 원유시스템트레이딩팀 과장(38)은 13년차 베테랑 원유 트레이더다. 하지만 지난달 폭설 때 중동에서 2, 3일 새 3척이나 발이 묶여버리는 비상사태가 벌어지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1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기 때문이다.

“항구가 폐쇄되지 않은 중동의 다른 지역에서 선적을 준비하던 배 4, 5척에 연락해 출항을 서둘러 달라고 했죠. 하지만 여의치 않았습니다. 결국은 러시아에서 원유 70만 배럴을 사들여 급한 불부터 꺼야 했습니다.”

러시아는 사흘이면 한국에 유조선이 도착할 수 있어 비상수단으로 제격이다. 그러나 이쪽의 ‘위급함’을 들키면 터무니없는 가격에 원유를 살 수밖에 없다. 김 과장은 “나의 위급함을 절대적인 침착함으로 감춰야 한다”고 말했다.

2007년 입사한 같은 팀 신현 대리(30·여)는 선박 스케줄 조정 담당이다. 지난달 중동 폭설 땐 한국으로 오고 있는 유조선 20척은 물론이고 대기 선박 스케줄까지 한꺼번에 조정해야 했다. 외국 선적 항구의 상황, 울산공장 가동률, 해상 기상상황 등을 모두 고려해야 하는 만만찮은 작업이다. 게다가 원유의 종류와 품질이 다양해 ‘펑크’난 원유의 대체품을 제시간에 들여오려면 초고난도 ‘퍼즐 맞추기’를 순식간에 해내야 한다.

한국의 전체 원유수입량 중 중동이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해 85.1%였다. SK에너지 역시 70%가 넘는 물량을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 등 중동에서 사온다. 그러니 중동 정세에 관한 것이라면 아무리 작은 뉴스라도 꼭 챙긴다.

미국의 이란 경제제재 같은 ‘수소폭탄급’ 사태라도 터지면 트레이더들은 고행의 길로 접어든다. 한국은 미국의 이란산 원유 금수조치 예외국으로 인정받아 이란산 원유를 계속 수입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수입량을 상당부분 줄여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윤석현 원유시스템트레이딩팀장(43)은 곧바로 계약 수정을 위해 이란으로 날아갔다. 담당 임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의 뒷목에 날아와 꽂혔다. “해결 못하면 돌아오지 마.” 미국 눈치도 봐야 하고, 중요한 원유 공급루트도 지켜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란 거래처와의 협상은 윤 팀장의 출국 횟수가 10여 회에 다다를 때쯤 가까스로 타결됐다.

○ 소통이 최고의 경쟁력

유조선이 원유를 싣고 한국까지 운반해오는 과정에는 갖가지 변수가 도사린다. 가장 큰 적은 여름철 태풍이다. 또 1년에 대형 유조선 130∼140척이 투입되는 만큼 선박의 기계 고장으로 인한 지연도 가끔 일어난다. 지난해 11월 이라크에서 원유를 실은 그리스 국적의 유조선은 엔진부품 한 개가 문제가 돼 운항이 불가능했다. 예비 부품도 없어 아랍에미리트 항구로 가서 정비를 받아야 했다. 지난해 3월에는 쿠웨이트에서 출항한 유조선의 기관장이 크게 다치는 바람에 두바이로 회항하는 일도 있었다.

비상상황 발생 시 원유 트레이더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대개 12시간 안팎이다. 김 과장은 “보통 12시간 안에 확실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단기 원유 수급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며 “공장 가동에 영향을 줄 경우 엄청난 비용이 추가로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신 대리는 “우리 팀은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한국의 에너지 확보 ‘첨병’이라는 자세로 일한다”고 말했다.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원유사업부#SK에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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