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인균의 우울증 이기기]마음속에 사자를 키우고 있는 현대인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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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 피할 수 없다면 뇌 회복력 키우는 것을 생존전략으로 삼아야

류인균 이화여대 약대 석좌교수·정신과 의사
류인균 이화여대 약대 석좌교수·정신과 의사
아프리카 초원에서 평화롭게 무리 지어 있는 한 떼의 영양들과 이를 주시하고 있는 사자를 상상해 보자. 영양들은 사자를 인식하는 순간과 동시에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도망칠 방향을 빠르게 살피며, 사자를 피해 있는 힘을 다해 달려가게 될 것이다. 희생되는 영양이 한두 마리 있을 수 있겠지만 많은 영양 떼는 무사히 위험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얼마간의 평화로움이 있을 것이다.

사자와 사자를 피하기 위한 영양의 일련의 행동들은 스트레스와 이에 대한 신체적 반응으로 흔히 비유되며, 일종의 생존을 위한 전략으로 발달되어 왔다고 한다. 이러한 일련의 반응들은 인간인 우리에게도 본능적으로 자연스럽게 체득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사자를 피해 달려야 할 필요가 없는 현대에 사는 우리는 어떨까? 사자가 없는 세상에서, 지속되는 평화로움에 지루해하고 있는 것일까?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마감이 코앞에 있는, 처리해야 하는 서류들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면, 혹은 막히는 도로 한가운데에서 지각을 걱정하며 마음을 졸였다면, 혹은 오늘 마주쳐야 할 부담스러운 누군가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다면 우리는 누구나 자연스럽게 ‘스트레스’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복잡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딘가에서, 무엇 때문에, 누군가 혹은 스스로에 의해 끊임없이 스트레스에 노출되고 있다. 그것이 설령 우리의 생존에 큰 위협이 되지 않더라도, 적어도 우리에게서 이미 평화로움을 빼앗을 정도는 될 것이다. 우리에게 새로운 형태의 사자가 나타난 것이다.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기회가 적어지고, 크고 작은 스트레스로 계속 긴장 상태를 유지하게 될 때 우리의 몸과 뇌는 또 다른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최근 스트레스에 상대적인 노출이 많은 도시인들을 대상으로 한 독일 연구진의 연구 결과는 이러한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복잡한 현대사회의 스트레스에 지속적으로 노출될 경우 우리의 뇌가 더욱 예민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 이 연구에 따르면 전원에 사는 사람들에 비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같은 스트레스 자극에 의해서도 강력한 부정적인 뇌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특히 도시인의 경우 ‘주변인과 다르다고 느끼는 경우’ 혹은 ‘주변인에게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상황’ 등의 특정 사회적 자극에 뇌가 더욱 예민하게 반응한다고 한다. 문제는 이러한 부정적인 자극들에 대해, 우리는 흔히 객관적인 상황이나 판단으로 가늠하기보다 매우 주관적으로 느끼고 스스로 결정지어 생각한다는 점이다. 우리의 생존을 위협할 만한 스트레스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우리 스스로 마음속에 사자를 만들고, 그 사자의 위협에 생존이 위협당할 만큼 우리의 신체가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남들이 부러워하는 명문대에 진학하여 한창 꿈 많은 대학신입생 생활을 시작한 학생들이 채 1년이 지나지 않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련의 사고들을 접하며, 우리 모두가 걱정하고 안타까워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객관적인 판단만으로는 어려움이 없어 보이는 이들이 왜 벼랑으로 걸어가고 있는 자신을 멈추지 못한 것인지에 대한 안타까움은 비단 필자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쩌면,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상의 스트레스 혹은 스스로 만들어 낸 스트레스를 감당하고 이겨내야 하는 숙명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최근의 연구 경향들 또한 스트레스를 피하고 스트레스에 대한 부정적인 뇌 반응을 줄이는 기전을 찾으려는 연구에서,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에서도 우울증 없이 극복한 사례를 관찰하여 그 기전을 찾으려는 경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회복력(resilience)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뇌의 능력은 우울증의 예방과 치료에 화두가 되고 있는 연구 주제이기도 하다. 스트레스 상황을 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회복력과 같은 뇌의 탄성 능력을 키우는 것이 현대 사회의 새로운 형태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지킬 수 있고 생존의 전략으로 삼을 수 있는 무기일 것이다. 현재까지의 연구 결과로는 스트레스 상황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하려는 경향, 현실감에 바탕을 둔 긍정적인 마음가짐, 인지적으로 유연성을 가지는 것 등이 뇌의 회복력에 바탕이 되는 힘이라고 한다. 또한 주변 사람들의 도움과 사소한 관심들도 부정적인 반응을 줄이고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한다.

이미 우리의 뇌는 수많은 자극에 예민해져 있고, 현재의 스트레스에 가까스로 대처해내는 데도 버거워할 수 있겠다. 그러나 대체로 우리는 잘 적응해내고 있고, 하루하루를 잘 보내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지 못한 사소한 자극이 더해질 때 우리는 언제든지 흔들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자극은 가까운 사람과의 가벼운 갈등일 수도 있고, 수많은 시도 중 하나에서 오는 실패일 수도 있고, 막연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가벼운 감기나 불면증이 이미 일상에 버거워하는 나를 벼랑으로 걸어가게 할 수도 있겠다.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어느 순간 답답한 마음이 들고 우울한 느낌이 든다면 혹시 내가 마음속에 사자를 키우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그 사자가 정말 나에게 위협적인 것인지 찬찬히 마음속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겠다. 그리고 모두 힘들지만 함께 걷고 있는 일상에서 벗어나 벼랑으로 걸어가고 있는 누군가가 주변에 있다면 다시 뒤돌아 올 수 있도록 작은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 또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품앗이일 것이다.

:: 필자는 ::

서울대병원 전공의(1988∼1991), 하버드대 의대 및 매클레인 병원 전임의(1992∼1994), 하버드대 의대 전임강사(1994∼1996), 서울대 의대 정신과 교수(1996∼2012)를 거치면서 우울 및 불안 장애 환자 4000여 명을 진료하고, 120편 이상의 국제 학술 논문 및 해외 저서를 집필하여 명실상부 우울, 불안증에 대한 국내 최고 전문가 중 한 사람이다. 2012년 이화여대 약대 석좌교수로 부임하여 풍부한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우울 불안 장애의 새로운 치료법 및 원인을 밝히기 위한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필자를 통해 현대 우리 사회에서 마치 ‘역병’처럼 번지고 있는 우울증, 불안증과 관련하여 그 진단과 해법을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한다.

류인균 이화여대 약대 석좌교수·정신과 의사
#우울증#스트레스#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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