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묵의 ‘한시 마중’]<42>얼굴에 먼저 이른 봄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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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2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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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연말 행사로 몸이 지친 분이 많겠습니다만, 세밑이 너무 조용하면 오히려 외로운 마음이 드는 법입니다. 세모에 마음에 맞는 벗과 한잔 술을 마주하고 정담을 나누고 싶습니다. 16세기의 큰 선비 이언적(李彦迪·1491∼1553)은 부귀와 권세보다 한적함을 사랑하여 경주 외곽 자옥산(紫玉山)에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살았습니다. ‘독락’이 자신만의 고고한 뜻을 즐긴다는 뜻이니 그런 삶을 지향한 것입니다. 세밑에 벗들이 술을 들고 찾아왔기에 참으로 반가웠습니다. 얼른 맞아들여 편안한 마음으로 대화를 나눕니다. 아마도 벼슬이나 권세, 부귀 따위의 말은 오가지 않았겠지요. 비록 봄이 오려면 한참 있어야 하겠지만, 술 한잔 마셔 불콰해진 얼굴에 먼저 봄이 올 것이라 농을 던졌습니다. 독락당에서 보이는 자옥산이 겨울이라 휑하여 볼 것이 없다고 혹 탓할까 입을 막은 것이지요. 술은 삭막한 겨울을 봄으로 바꾸는 묘약입니다.

도학자로 알려진 이언적이지만 그의 시를 보면 풍류와 운치를 알았던 듯합니다. 눈 내리는 날 인근에 있는 백률사(柏栗寺)를 찾았는데 벗들이 밤에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 기쁨에 “눈 내리는 산중의 밤에 기쁘게 자네들 찾아오니, 술을 들고 난간에 기대 다시 쾌재를 부른다네. 하늘과 땅 사이 흥이 끝이 없으니, 왕자유가 왔다 그냥 간들 웃고 버려둔다네(雪天山夜喜君來 把酒憑(난,란)更快哉 天地中間興無盡 笑他王子到門廻)”라고 노래하였습니다. 눈을 보고 흥이 일어 벗을 찾아 나섰다가 흥이 사라지자 그냥 돌아가 버린 친구 왕자유(王子猶)보다 온밤 함께 눈을 즐길 벗이 좋다고 하였습니다. 눈 오는 밤 정다운 벗과 한잔 술로 청춘을 돌리는 것도 과히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이종묵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시#봄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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