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박현진]시름 깊어지는 월가를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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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8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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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진 뉴욕 특파원
박현진 뉴욕 특파원
“미국은 대단할 정도로 자유로운 국가다(It’s a free fucking country).”

미 최대 상업은행인 JP모건체이스의 제이미 다이먼 회장이 지난주 뉴욕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내뱉은 한마디 때문에 언론의 도마에 올랐다. 저명인사가 공개적으로 ‘퍼킹(fucking)’이라는 비속어를 입에 담았다.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JP모건체이스가 수십억 달러의 파생금융상품 손실을 낸 이후 언론의 집중포화에도 절대 냉정함을 잃지 않았던 그였다.

문제의 발언은 최근 은행가 모임의 분위기를 전하는 가운데서 나왔다. 행사에 참석한 수백 명의 은행가 가운데 85%가량이 미 정부의 보복이 두려워 금융개혁 방안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지 못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다이먼 회장은 인터뷰에서 “여기는 소련이 아니라 할 말을 하는 미국이다. (월가를 공격하는 것에 관련해) 전 세계가 미쳐 돌아가고 있다”며 절제되지 않은 발언을 쏟아 냈다. 그는 ‘월가의 수호신’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미 정부의 금융개혁 조치에 맞서 온 대표적인 인물. 그가 평상심을 잃은 것은 최근 이곳 금융인들의 초조함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월가 금융인들이 후환이 두려워 금융개혁안에 섣불리 반대하지 않고 있다는 주장은 근거가 희박한 핑계로 들린다. ‘세계 자본주의의 심장’이라는 브랜드를 스스로 갉아먹은 마당에 반대할 근거가 없다는 것이 더 정확한 이유일 것이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잊을 만하면 터지는 미 금융회사의 각종 비리와 금융사고는 내용마저 후진적이다. 거액의 고객 자금을 횡령하는가 하면 투자의 기본 원칙을 어긴 사례도 있었다. 이달 초 뉴욕 증시에서 한 증권 중개회사가 전산시스템 오류로 45분 만에 5000억 원 가까운 손실을 투자자에게 입힌 사고는 월가의 신뢰를 바닥까지 끌어내렸다. 1년 넘게 월가를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과연 이곳이 한국 등이 벤치마킹했던 선진금융의 중심지가 맞는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신뢰 추락의 후폭풍은 여러 방면에서 목격되고 있다. 월가의 터줏대감인 골드만삭스는 최근 한 투자설명회에서 뉴욕에 굳이 큰 사무실을 둘 필요가 없다는 요지의 설명을 했다. 도이체방크 크레디트스위스 등 글로벌 금융회사는 물론이고 미국 금융회사마저 월가의 인력을 다른 도시로 재배치하며 짐을 싸고 있다.

월가가 휘청대는 사이 반사이익을 챙기는 곳도 있다. 국제금융시장의 변방이다가 최근 건실한 자국의 경제상황으로 투자자들의 러브콜을 받고 있는 노르웨이 금융회사가 대표적이다. 뉴욕 맨해튼에 사무실을 둔 노르웨이 최대 은행인 DNB 미국지사는 투자 수요가 몰리면서 월가에서 해고된 전문 인력을 손쉽게 끌어모으고 있다. 아시아의 금융허브를 꿈꾸고 있는 한국도 이곳의 넘쳐 나는 금융 인재를 유치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금융감독원과 국내 금융회사들이 다음 달 22, 23일 뉴욕 맨해튼을 찾아 채용 설명회를 연다.

인재를 끌어모으는 것도 좋지만 월가의 최근 수난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았으면 한다. 첨단 선진 금융 기법과 유능한 인재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금융시스템에 대한 신뢰다. 국내 금융회사들이 대출금리의 근간이 되는 양도성예금증서(CD) 금리를 담합한 혐의가 금융권의 초대형 뇌관으로 잠재해 있는 한국으로선 더욱 그렇다. 월가 금융인들에겐 가당치 않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월가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여전히 한국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고 있다.

박현진 뉴욕 특파원 witness@donga.com
#미국#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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