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rrative Report]40년 전 편지 한 통에 캐나다 어머니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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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7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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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세 허용환 씨-80세 켄드릭 씨, 800여통 펜팔로 맺은 인연

한 통의 편지가 바꾼 삶. 그는 태블릿PC를 꺼내 캐나다 ‘어머니’의 사진을 보여줬다. 그는 아무리 통신기술이 뛰어나도 꼭 손으로 편지를 써서 보낸다. 그래야만 상대방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그의 뒤로 태평양을 건너온 편지들이 보인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한 통의 편지가 바꾼 삶. 그는 태블릿PC를 꺼내 캐나다 ‘어머니’의 사진을 보여줬다. 그는 아무리 통신기술이 뛰어나도 꼭 손으로 편지를 써서 보낸다. 그래야만 상대방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그의 뒤로 태평양을 건너온 편지들이 보인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 어머니, 20년 만에 처음으로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앞으로 6시간만 지나면 어머니를 뵙게 되는데도 이 마음을 글로 남기고 싶어 펜을 듭니다. 목소리는 어떨지, 키는 얼마나 클지, 생김새는 사진과 어떻게 다를지 모두 궁금하네요. 어머니도 같은 마음이실 거란 생각을 합니다. 참 떨립니다. 지난달 결혼식에서 사회를 본 친구 녀석이 “신랑 입장!”이라고 외칠 때보다 더 말이에요.저는 지금 제 아내와 함께 가고 있습니다. 고마운 아내는 어머니께 꼭 당신의 얼굴을 보여주고 싶다는 제 이야기에 선뜻 신혼 여행지를 캐나다로 바꿨습니다. 가까운 미국에 있으면서도 찾아뵙지 못해 늘 죄송한 마음뿐이었어요. 영어만 잘하면 미국생활은 문제없을 거란 생각은 정말 큰 착각이었어요. 닥치는 대로 밑바닥 일을 했지만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한국으로 돌아갈까 생각도 했지만 그때마다 흔들린 저를 잡아준 건 어머니의 편지였어요. 다행히 얼마 전 미군 군무원 일자리를 구했어요. 한국 파견이 가능하다는 말에 눈이 번쩍 뜨였죠. 사실 아내를 만나는 데도 ‘편지’가 큰 몫을 했습니다. 미국에 거주하는 저는 한국에 있는 그녀에게 늘 편지로 마음을 전했어요. 글이라는 것이 참 더 애틋함을 갖게 하잖아요. 아내는 매달 제가 보낸 편지에서 진심을 느끼고 결국 청혼을 받아줬답니다. 편지는 참 묘한 매력이 있어요. 어머니의 편지에는 늘 당신의 손 냄새가 묻어 있어요. 세 아들을 키운 손, 병상에 누운 환자들을 어루만지는 간호사의 손 그리고 직접 종이에 살갗을 대고 이국땅의 아들인 제게 편지를 쓰는 손. 편지에서 전 어머니의 냄새를 맡았답니다. 그리고 제가 편지에서 느꼈던 캐나다의 봄 향기가 지금 배 위를 스치는 바람 속에 그대로 있군요. 어느새 배가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곧 뵙겠습니다.

―1992년 2월 캐나다 밴쿠버 섬으로 가는 여객선상에서 》
○ 편지 한 통에 바뀐 인생

그는 미국 시민권자다. 현재 경기 평택시의 한 건설 관련 회사에서 임원으로 근무하고 있지만 과거 그의 삶은 간단치 않았다. 한국에선 육군 통역병, 무역회사 직원, 미국에선 사진관 종업원, 접시닦이, 뉴욕의 택시운전사, 미군 군무원 등 10여 가지 직업을 가졌다.

경북 의성군의 한 시골 동네에서 태어난 그가 미국으로 건너가 다양한 인생역정을 겪은 것은 편지 한 통 때문이었다. 40년 전 얼굴도 모르는 벽안(碧眼)의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가 자신의 삶을 통째로 바꿔버릴 줄 몰랐다.

18일 서울 용산구 서부이촌동 자택에서 만난 허용환 씨(53)는 안방에서 묵직한 여행용 가방을 들고 나왔다. 빛바랜 누런 편지봉투가 쏟아져 나왔다. 받은 것만 600통이 넘는단다. 청년시절 아내와 주고받은 연애편지부터 방송인 하일, 가수 인순이가 허 씨에게 보낸 편지도 있다.

그런데 영문으로 주소가 적힌 편지들이 가장 많았다. 주소지는 캐나다 밴쿠버 바로 건너편에 있는 밴쿠버 섬이고 발신인은 비비엔 켄드릭. “캐나다 어머니”라며 허 씨는 앨범에서 두 장의 사진을 꺼내 보여줬다. 한 장에는 까까머리 중학생, 다른 한 장에는 코가 높은 40대 외국인 여성이 있었다. 40년 전 두 사람이 펜팔을 시작할 당시 모습이다.

소년이었던 허 씨는 어느새 돋보기를 써야 하는 중년이 됐고, 중년이었던 어머니는 80대 할머니가 됐다. 그는 다시 가방 안으로 손을 밀어 넣어 1972년 6월 9일 처음 캐나다에서 온 편지를 소중하게 꺼냈다. 그렇게 캐나다 어머니와 한국 아들 사이에 40년간 오간 800여 통의 편지에 담긴 사연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 1972년, 캐나다에 보낸 첫 편지

40년 전… 중학생, 그리고 펜팔 40년 전 두 사람이 주고받은 서로의 사진. 어느새 40년이 지나 벽안의 여성은 증손녀를 둔 할머니가 됐고, 까까머리 중학생은 머리가 희끗한 중년이 됐다. 허용환 씨 제공
40년 전… 중학생, 그리고 펜팔 40년 전 두 사람이 주고받은 서로의 사진. 어느새 40년이 지나 벽안의 여성은 증손녀를 둔 할머니가 됐고, 까까머리 중학생은 머리가 희끗한 중년이 됐다. 허용환 씨 제공
나의 캐나다 친구에게. 안녕하세요, 비비엔 켄드릭 씨. 대한민국 경북 의성군에 사는 허용환입니다. 열세 살 중학생이에요. 처음 켄드릭 씨의 편지를 받았을 때 뛸 듯이 기뻤답니다. 외국인에게 편지를 받다니. 게다가 이곳에서 볼 수 없는 하얗고 빳빳한 편지지가 신기했어요. 하지만 당신의 편지를 읽을 수가 없어 곧 슬픔에 빠졌답니다. 구레나룻이 멋진 중학교 영어 선생님께 여쭸더니 필기체라고 하네요. 선생님은 줄 사이의 여백에 일일이 해석을 달아주셨어요. 사실 이 편지도 선생님이 대신 써주시는 거랍니다. 올해 안에는 꼭 직접 영어로 편지를 써서 보낼 생각입니다.

지난해 국민학교 수학여행으로 대구라는 곳에 갔어요. 처음 가본 대구에서 책에서만 봤던 서양 사람을 직접 구경한 거예요. 노란 머리, 오뚝한 콧날에 청바지를 입은 다리는 어찌 그리 길던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죠. 그때 결심했어요. ‘영어를 공부해야겠다.’

그때 생각해낸 방법이 바로 펜팔이었어요. 이듬해 중학생이 되자마자 어머니께 펜팔협회에 가입시켜 달라고 매달렸어요. 어머니는 약초를 뜯어 번 돈으로 가입비 500원을 내주셨어요. 제일 좋아하는 짜장면이 한 그릇에 90원이라 시골에선 큰돈이었죠. 처음 협회 배지를 달고는 명문대 배지를 단 대학생이라도 된 양 우쭐대던 기억이 나요.

저는 외교관 아니면 기자가 되고 싶어요. 대구에서 만났던 그런 백인 아저씨는 물론 전 세계 다양한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싶어요. 영어를 배울수록 저는 더 많은 것을 꿈꾸게 되겠죠?

당신의 편지에선 캐나다의 봄 향기가 난답니다. 사진으로만 봐오던 캐나다의 울창한 숲과 강의 향기가 이런 것 아닐까 생각해봐요. 사실 전 붉은 단풍이 새겨진 국기 외에는 캐나다에 대해서 잘 몰라요. 편지를 읽어 보니 당신도 한국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당신이 편지에 쓴 6·25전쟁은 벌써 20년이나 지난 이야기인걸요. 당신이 태어난 영국, 그리고 현재 살고 있는 캐나다, 그 어느 곳의 이야기라도 좋아요. 당신이 이야기하는 만큼 제 꿈은 더 커질 테니. 첫 번째 편지는 여기서 줄일 게요. 태평양을 건너올 두 번째 편지를 기다리며… 안녕.

○ 1982년, 어머니께 드리는 통역병의 편지

디어 맘(Dear Mom·사랑하는 어머니).

신고합니다! 대한민국 육군 허용환입니다. 건강하게 잘 지내시죠? 어머니, 지난해 9월 1988년 올림픽 개최지로 서울이 선정됐어요. 6년 전 캐나다에서 열린 몬트리올 올림픽이 생각나네요. 그때 어머니께서 몬트리올 올림픽에 관한 재밌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는데, 이젠 제 차례네요.

저는 경남 김해에 있는 군부대에서 통역병으로 근무하게 됐어요. 청바지 입은 외국인의 다리 길이를 보고 놀랐던 꼬마가 이제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이라니 믿어지세요? 군에 같이 입대한 통역병들 가운데 저만 유일하게 고졸이에요.

돌이켜보면 정말 저의 영어 사랑은 각별했어요.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이었어요.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평소와는 달리 길이 꽉 막혀 있었죠. 무슨 일인가 하고 봤더니 미군이 몰던 차가 택시와 접촉사고를 내 승강이를 벌이고 있더군요. 저는 당장 버스에서 내려 그 미군에게 갔어요. 사실 제 머릿속엔 그를 도와주겠다는 생각보다 영어로 대화할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이 앞섰죠. 저는 의사소통이 안 돼 어쩔 줄 몰라 하는 미군과 택시 운전사의 말을 통역했죠. 그때 버스 안에서 저를 바라보던 여고생들의 눈길을 생각하면 지금도 어깨가 으쓱해져요.

그 사건이 인연이 돼 저는 그 미군과 친구가 됐어요. 그의 집에도 가고, 군부대에서 열리는 파티에도 초대됐죠. 부대에 있는 미군들을 불러 학교에서 영어 특강을 주선한 적도 있었어요. 친구들의 입이 떡 벌어졌죠.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게 어머니 덕분이에요.

어머니의 은혜는 그뿐이 아니었죠. 제가 부모님의 곁을 떠나 형들이 있는 대구로 가던 그해부터 어머니는 세 달에 한 번 제게 30달러를 보내주셨죠. 타지에서 밥 거르지 말고, 읽고 싶은 책 모두 사서 보라고. 가끔은 신장이 안 좋으신 한국의 어머니를 위해 약값도 보태주셨죠.

―한국의 아들 휴버트 올림

○ 2012년, 어머니의 답장

1973년 2월 캐나다 ‘어머니’ 비비엔 켄드릭 씨가 허용환 씨에게 쓴 편지.
1973년 2월 캐나다 ‘어머니’ 비비엔 켄드릭 씨가 허용환 씨에게 쓴 편지.
아들 용환, 그리고 그의 아내 순희에게.

보내준 편지는 잘 받았다. 나는 평소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 발코니에 앉아 바다를 가르는 여객선들을 바라보고 있어. 저 배는 이 시간에 지나가는 것을 보니 아마도 알래스카로 가는 배인 모양이다. 원래 계획대로 이번 여름에 너희 가족이 이곳에 왔다면 좋았으련만. 더이상 긴 여행을 떠나기 힘든 나 자신이 안타까울 뿐이구나.

편지와 함께 사진들을 보내준 덕에 그곳의 소식은 잘 전해 듣고 있다. 준호, 준영, 연재 하나같이 너를 닮아 모두 예쁘게 자라고 있구나. 결혼 뒤 9년 동안 아이를 갖지 못해 너희 부부가 아파하던 순간이 문득 거짓말 같았다는 생각이 들어.

여섯 살배기 동갑인 연재와 내 증손녀 라이더가 올해부터 펜팔을 시작했더구나. 네가 연재에 대해 이야기한 것처럼 라이더도 편지에 몹시 빠져 있는 듯해. 제 딴에는 우표가 얼마나 신기할까. 이 아이들은 앞으로 몇 년간 편지를 주고받을까? 40년 아니면 80년? 그건 그 아이들의 몫이겠지. 늘 행복해라. 고맙다 아들아.

―너의 ‘캐나다 어머니’ 켄드릭이

강홍구 기자 windup@donga.com
#편지#Narrative Rep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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