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한상복 남자이야기]<22>휴가철, 책 읽는 즐거움 다시 느껴보기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7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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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서점에 들어서자 ‘휴가철 필독서’ 코너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최고경영자들 혹은 전문가들의 추천을 받은 책들이 탑처럼 쌓여 있었다. ‘필독서’라는 어감의 강한 압박. 그는 사람들 틈에서 필독서들을 들춰보다가 불안해졌다. 역시 몇 권을 사들고 가서 읽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지. 나중에 높은 분과 점심을 함께하다가 ‘휴가 때 어떤 책을 읽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둘러댈 방패로.

전생에 대역무도한 죄를 아흔아홉 번은 지어야 대한민국 샐러리맨이 되는 모양이다. 휴가 때 읽을 책을 고르는 사소한 일마저 고역인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남자는 그런 두려움을 용케 물리치고는 마음먹었던 대로 추리소설 코너로 향했다. 이번 휴가만큼은 다르게 보내고 싶었다.

남자는 매년 이 무렵이면 독서 스트레스를 받았다. 휴가는 반갑지만 ‘거룩한 필독서들’은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작년까지는 휴가철 필독서의 대열에 매년 거르지 않고 참여해왔다. 변화와 트렌드에 뒤지지 않으며 교양서를 읽는 수준 있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포지셔닝하고 싶었다.

하지만 필독서들은 휴식보다는 ‘압박의 추억’을 남겨 놓았다. 무게의 압박과 내용의 압박, 급기야 쏟아지는 졸음의 압박. 앞부분을 읽다가 포기하기를 연례행사처럼 되풀이하면서, 솔직한 마음으로 그런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쉬면서 긴장을 풀어야 할 휴가 때 왜 낯설고 어려운 책들을, 필독서 혹은 대세라는 이유로 억지로 읽어가며 골머리를 앓아야 하는 것인지.

그렇게 독서습관으로부터 차츰 멀어졌던 것 같다. 책 한 권을 끝까지 읽어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다. 남자는 추리소설 코너에서 끌리는 책들을 골라 바구니에 담았다. 계산대에 올려놓고 보니 아홉 권이나 됐다. 언젠가는 깊이 있는 책들을 편안하게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마지막 장까지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으로 독서습관을 다시 들이는 게 우선이었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독서가 아닌 자기 내면의 즐거움을 위한 독서로.

남자는 지하철 안에서 소설에 빠져 있다가 내려야 할 역을 지나치고 말았다. 계단을 뛰어올라 반대편 플랫폼으로 향하면서도 마음이 뿌듯했다. 책 읽는 즐거움을 순수하게 느껴본 게 얼마 만인지. 자신의 눈높이를 인정하고 남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했다. 용기를 한 번 발휘하니까 또 다른 자신감이 치솟았다. 나중에 높은 분의 질문에도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추리소설을 쌓아놓고 읽었는데요. 재미있는 걸로 추천해 드릴까요?”

한상복 작가
#휴가철#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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