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rrative Report]부천FC1995, 너에게 모든 걸 걸었어!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3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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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도 잘하고 만화도 뜨고… 부천 연고 K3리그 구단과 시민의 러브스토리

부천 FC를 바탕으로 한 웹툰 ‘모든 걸 걸었어’. 가운데 인물이 차기석 선수를 모델로 한 주인공 차기성 선수다. 드림컴어스 제공
부천 FC를 바탕으로 한 웹툰 ‘모든 걸 걸었어’. 가운데 인물이 차기석 선수를 모델로 한 주인공 차기성 선수다. 드림컴어스 제공
《 2009년 7월 18일. 아침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정민 ‘부천FC1995’(부천FC) 운영팀장(35)은 설레면서도 초조했다. 이날 한국 축구 K3 리그(현 챌린저스) 팀인 부천FC와 영국 7부 리그 팀인 FC 유나이티드 오브 맨체스터(유맨) 간 친선경기가 예정됐다. 연초 SK텔레콤이 진행한 소망 이벤트에 부천FC 서포터 모임인 헤르메스가 “해외 구단과 경기를 하고 싶다”는 사연을 보내 당첨됐는데, 하필 비가 내리는 것이다. 그런데 초조함을 남김없이 쓸어버리는 광경이 벌어졌다. 경기 시작을 얼마 안 남겨놓고 빨간 옷을 입은 팬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부천종합운동장 관중석을 꽉 채워버렸다. 》
○ ‘부천FC1995’의 그날

국가 간 친선경기의 일반적 관중 규모인 1만 명의 두 배가 넘는 2만3000여 명이었다. 정 팀장은 눈물이 핑 돌았다. “2002년 월드컵 같잖아.” 뿌연 시야 너머로 날벼락 같은 소식이 전해졌던 2006년 그날의 장면이 떠올랐다.

경기 부천이 연고였던 프로 축구팀 부천SK가 갑자기 제주로 연고지를 옮긴다는 소식에 부천 팬들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이 지역 팬들이 1995년 PC통신 하이텔에서 결성한 헤르메스는 새로운 시도를 하기로 결정했다. 쉽게 연고 이전을 하는 기업 대신 지역 팬들이 직접 운영하는 축구팀을 만들기로 한 것. 부천FC란 구단 이름에 1995가 붙은 것도 ‘팬을 위한, 팬에 의한, 팬들의 클럽’임을 확실히 하겠다는 뜻에서였다. 2008년 K3 리그에 처음 출전했다. 15개 팀 중 13위를 기록했지만 평균 관중 수의 다섯 배 가까운 관중 동원력을 보이며 최고 인기 구단으로 우뚝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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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부천FC와 경기를 치르는 유맨 역시 영국 명문 프로구단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가 미국 재벌에 인수되는 것을 반대하는 영국 시민들이 2005년 자발적으로 창단한 구단이었다.

“앞으로 이런 경기를 두 번 다시 할 수 있을까.”

부천FC 창단 때부터 함께해 온 FW 정현민 선수(29)는 관중의 엄청난 함성 속에 그라운드의 잔디를 밟으면서 미친 듯 가슴이 뛰었다. 대학 졸업 후 여러 구단의 테스트를 받았고 번번이 고배
를 마셨다. 그렇게 몇 해가 흘렀다. 축구를 포기하고 작은 중소기업체를 운영하는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으려는 순간 부천FC 창단 소식을 들었다. 3부 리그 신생팀인 데다 연봉 계약은커녕 경기를 뛰어야만 수당을 받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테스트장으로 달려갔다.

입단해 보니 자신의 사연은 ‘양반’에 속했다. 선수용 축구화 하나 사기 어려울 정도로 가정 형편이 어려운 선수부터 해외 여러 리그를 전전하다 귀국한 선수, ‘코리안 드림’을 찾아 한국에 온 아프리카 출신 노동자까지 다양한 이들이 모였다. 대부분 축구에만 전념할 수 없는 ‘투잡’족이었지만 꿈은 하나였다.

이날 경기는 부천FC가 3-0으로 승리했다. 부천FC가 탄력을 받아 일마다 잘 풀려가기 시작한 분기점이었다. 먼저 청소년대표팀 주전 골키퍼 출신인 차기석 선수(26)가 합류했다. 차 선수는 거스 히딩크 전 국가대표팀 감독의 눈도장을 받아 PSV에인트호번 훈련까지 참여했지만 20세 때 신부전증에 걸려 2006년 아버지의 신장을, 2008년 작은아버지의 신장을 이식받았다.

“기석이가 오고 나서 2009년 하반기와 2010년 저희 팀 성적이 정말 좋았어요. 특히 실점률이 낮았죠. 한때 리그 1위까지 치고 올라갔다니까요. 기석이는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음에도 ‘어떻게 이런 아이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뛰어났어요. 실력과 외모, 인성 모두 훌륭했는데, 기석이만 생각하면 마음이 참 아프죠.”(정 선수)

부천FC는 조금씩 다져졌고 부천 시민의 자발적 후원도 이어졌다. 그러던 2011년 봄 어느 날 정 팀장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우리를 소재로 만화를 만들고 싶다고요?”

○ ‘부천 시민’ 만화가들의 그날


‘모든 걸 걸었어’ 시즌 1의 마지막 회가 연재된 19일 오후 경기 부천시 부천종합운동장에서 만화가들과 부천FC 선수 및 관계자들이 만났다. 왼쪽부터 최완우 작가, 황재오 드림컴어스 대표, 오석원 부천FC 디자인팀장, 이창민 마케팅 플래너, 박문기 주장, 정민 운
영팀장, 정현민 선수, 최종훈 작가.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모든 걸 걸었어’ 시즌 1의 마지막 회가 연재된 19일 오후 경기 부천시 부천종합운동장에서 만화가들과 부천FC 선수 및 관계자들이 만났다. 왼쪽부터 최완우 작가, 황재오 드림컴어스 대표, 오석원 부천FC 디자인팀장, 이창민 마케팅 플래너, 박문기 주장, 정민 운 영팀장, 정현민 선수, 최종훈 작가.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도대체 몇 명이나 온 거야?”

2009년 7월 18일. 만화가이자 콘텐츠사업가인 황재오 드림컴어스 대표(37)는 케이블TV가 중계하는 부천FC와 유맨의 경기를 보다 번쩍 몸을 일으켰다. 온통 붉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관중석을 꽉 채운 채 혼신을 다해 응원하고 있었다.

10년 전부터 이곳에 살아온 부천 시민 황 대표도 부천FC의 인기가 저렇게 많은 관중을 모을 정도인 줄은 몰랐다. 게다가 차 선수가 이 구단에 영입됐다는 소식도 알게 됐다. “오직 축구화를 신고 다시 달리기 위해 몸 안에 ‘4개의 신장’을 달아야 했던 사나이가 3부 리그 팀에서 재기를 꿈꾼다? 이거 만화 되겠는데….”

한국만화영상진흥원(진흥원)과 부천만화창작스튜디오가 있는 부천은 ‘만화의 도시’로 불린다. 황 대표도 이 스튜디오 입주 작가다. 부천FC 이야기를 마음속에 품어 오던 그는 지난해 초 진흥원으로부터 “부천을 홍보하는 만화를 기획해 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경기도와 부천시로부터 일정액의 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다.

“금상첨화였죠. 한번 제대로 만들어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당시 미디어 다음에서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최종훈(필명 HUN) 작가와 네이버에서 인기가 높았던 ‘갓 오브 하이스쿨’의 박용제 작가에게 같이 하자고 제안했죠. 초등학교 때 축구선수였던 ‘스마일 브러시’의 최완우 작가(필명 와루)도 섭외했어요. ‘부천 시민’ 만화가들로 이뤄진 최고의 드림팀이라고나 할까요.”

황 대표와 최종훈 작가는 부천종합운동장에서 정 팀장을 만나 2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눴다. 이 운동장은 옛날 진흥원이 있던 곳이라 두 사람에게도 무척 익숙했다. “사실 전 축구를 잘 몰랐어요. 하지만 선수들 이야기를 듣고는 충분히 재미있게 만들 수 있겠다 싶었죠. 첫 미팅 후 바로 1회 콘티를 짰어요.”(최종훈 작가)

이렇게 해서 황 대표와 최종훈 작가가 쓰고 박 작가와 최완우 작가가 그린 웹툰 ‘모든 걸 걸었어’가 2011년 11월 28일부터 매주 월요일 다음 ‘만화 속 세상’에 연재됐다. 만화는 차기석 선수가 모델인 차기성 선수가 두 번째 신장 이식 수술을 받은 후 오합지졸 부천FC 선수들을 모아 함께 새로운 축구 인생을 펼치는 모습을 담았다.

네 작가는 부천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고 부천FC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과 애정을 취재했다. 그리고 낱낱이 만화에 담아냈다. 만화 속 알코올의존증 환자인 함주명 선수가 술 마시고 쓰러진 곳은 부천에서 유명한 포장마차 골목이다. 바람둥이 웨이터인 윤성필 선수가 일하는 곳은 전국적 명성을 지닌 부천 명물 나이트클럽 ‘메리트’가 배경이다.

이 만화에 대한 부천 시민의 애정은 열렬했다. 총 16회 연재된 ‘모든 걸 걸었어’는 회당 30만 명 이상이 봤다. 합치면 조회수 500만 번에 이른다. 정 팀장은 “매주 월요일 만화가 업데이트될 때마다 부천FC 사무실은 (선수들이 만화를 보느라) 정적에 휩싸이는 반면, 사이트 게시판과 SNS 공간은 난리가 난다”고 전했다. 최종훈 작가는 “댓글 대부분은 부천 시민이 다는 것 같다”고 했다. “특정 장소를 가리키며 ‘나 저기 가봤는데’라는 말부터 ‘후원하겠다’는 응원까지 다양해요. 재미있다는 것보다 부천FC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는 이야기가 더 기쁘더군요.”

○ ‘모든 걸 걸었어’의 그날

“부천FC 대 유맨. 누군가는 조롱거리가 될까 하는 우려의 소리를…. 누군가는 소리 없이 묻힐까 걱정을…. 이 경기가 2만3000명의 관중을 동원하며 전율의 경기가 될 것이라는 상상이나 했겠는가.”

2009년 7월 18일. 부천FC와 ‘부천 시민’ 만화가들을 연결해줬던 ‘모든 걸 걸었어’는 이날의 경기를 예고하며 19일 시즌1을 마무리했다. 만화책으로는 4월 2일 출간할 계획이다. 시즌2는 이날의 경기를 다룰 예정. 현재 경기도와 부천시, 진흥원과 시즌2 제작에 대해 협의 중이다.

실화를 기반으로 했지만 구단의 역사와 경기 시점, 선수들의 개인사 등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허구로 그렸다. 만화에선 주인공 차기성 선수가 유맨과의 경기를 뛰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 모델인 차기석 선수는 이 경기 후 구단에 본격적으로 합류했다. 안타깝게도 차 선수는 건강이 악화돼 훈련과 경기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 정 선수를 비롯한 동료와 팬들이 ‘마음이 아프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작가들은 31일 부천FC 홈경기 개막식 때 저자 사인회를 한다. 최종훈 작가는 호돌이 복장을 하고 나와 사비로 구매한 만화책 200세트(총 400권)를 구단에 기증할 예정이다.

‘모든 걸 걸었어’는 이제 지역 기반 콘텐츠를 잘 활용한 모범 사례로 꼽히고 있다. 지역과 함께함으로써 콘텐츠 창작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했고, 지역 이야기로 지역 독자들의 관심을 끌어냄으로써 작지만 강한 마니아 팬을 모았다. ‘문화로 먹고살기’의 저자인 경제학자 우석훈 씨는 “지역 기반 콘텐츠를 잘 활용하면 작은 자본과 규모로도 풍성한 이야깃거리와 최소한의 구매자를 확보할 수 있다. 문화산업은 분산해야 커진다”고 강조했다.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만화#부천FC#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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