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성호의 옛집 읽기]<14>‘못생긴 땅에 지은 집’ 수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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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2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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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양동마을 제공
경주 양동마을 제공
어린아이들은 항상 ‘본부’가 필요하다. 어릴 때 눈이 오면 세숫대야로 눈벽돌을 찍어 이글루를 만들고, 딱지며 구슬을 가져다 놓고 겨울 내내 놀았던 기억이 있다. 처음 수졸당(守拙堂)을 만났을 때, 재빠르게 내 어린 시절의 겨울이 떠올랐다. 그러나 내 장난기 어린 눈에는 그렇게 보여도 수졸당은 이언적의 4대손 이의잠의 집이고, 여강 이씨 수졸당파의 종가다.

그러나 재밌다. 집 주변을 가파르게 둘러싸고 있는 지형은 일부러 쌓은 토성같이 느껴진다. 더구나 그 토성 위에 사당이 있는데 안채에서 사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올라가나 했더니 토성 같은 산세를 타고 그대로 빙 둘러서 올라간다. 충분히 안채에서 계단을 낼 수 있었는데도 자연스러운 경사를 이용해 사당에 접근한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토성의 높이는 거의 지붕 높이에 가까워서 집이 바로 내려다보인다.

조선 반가의 사당은 대부분 집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지만 수졸당처럼 안채와 극단적인 높이에 자리하지는 않는다. 사당에 계신 조상들이 항상 자손들의 삶을 굽어 살피기에는 좋은 자리이긴 했다. 집의 평면도, ㄱ자형 안채와 一자형 문간채, 그리고 거기에 ㅣ자형 사랑채가 나중에 증축되어 전체적으로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안마당으로 통하는 문도 사랑채와 문간채 두 군데가 있다. 평면이 시계 방향으로 ㄱ자, 一자, ㅣ자로 돌아가고 사당으로 올라가는 높은 지형도 같은 시계 방향으로 올라간다. 집도 돌고, 집을 감싸고 있는 지형도 돈다.

자꾸 재밌어지려다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든다. 심수정도 그렇고, 향단도 그렇고, 이향정도 그렇고, 수졸당도 그렇고, 여강 이씨의 집들은 모두 가파른 지형에 앉아 있다. 그래서 애써 산을 깎고 다듬어 집을 앉힌다. 지도를 펴놓고 꼽아보니 여강 이씨의 집은 대부분 마을 중심으로 내려오는 가파른 산중턱에 있고, 월성 손씨의 집은 더 높은 능선에 퍼져 있었다. 양동의 산은 더 높은 능선 쪽이 경사가 훨씬 완만하다. 처음 양동에 자리 잡은 월성 손씨들이 좋은 자리는 다 차지해 살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나중에 세력을 키운 여강 이씨에게는 못생긴 땅만 남았을 것이고, 어쩔 수 없이 불리한 지형을 최대한 유리하게 이용했을 것이다. 그 결과 향단과 수졸당 같은 독특한 집들이 생겨났다. 땅이 못생길수록 집은 더 기발해진다.

함성호 시인·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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