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주이야기]호주 레드와인 ‘펜폴즈 그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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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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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혹평 딛고 세계 최고 와인 반열에

사람들은 가까이 있는 것의 가치를 잘 모른다. 특히 향토색을 담은 제품의 경우 그 자체의 독특함을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다. 향토색이란 자기 몸에 이미 배어 있는 속성이기 때문에 누군가 이야기해 주지 않으면 그 존재조차도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막걸리’를 등한시해 오다 최근에 들어서야 그 가치를 알게 된 것처럼 외국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종종 발견된다.

호주에서 최고급 와인으로 평가받는 ‘펜폴즈 그랜지’가 그런 술이다. 펜폴즈 그랜지가 처음 탄생할 때 이 술은 그다지 주목 받지 못하는 ‘미운 오리새끼’에 불과했다.

펜폴즈의 역사는 150여 년 전 크리스토퍼 로손 펜폴즈에 의해 시작됐다. 의사였던 펜폴즈는 와인이 의학적으로 효능이 있다고 보고 병원 근처에 포도밭을 가꿔 환자 치료용으로 쓸 와인을 직접 만들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다 보니 치료용이 아닌 음료로서 이 와인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이렇게 시작된 펜폴즈는 1870년 이후 호주 와인 시장이 큰 폭으로 성장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1950년 프랑스 보르도에서 와인 양조법을 배운 와인메이커 막스 슈버트가 합류해 자신만의 양조법으로 ‘그랜지’를 만들어 낸다. 그랜지는 기존의 호주 레드 와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있는 맛을 보여줬다.

하지만 그랜지는 당시 호주 국내 와인 전문가들로부터 혹평을 받았다. 어느 전문가는 심지어 “짓이겨 놓은 개미 맛이 난다”고까지 말했다. 결국 회사는 막스 슈버트에게 그랜지 생산을 중단하도록 지시했다. 막스 슈버트는 그러나 이 술의 제조를 중단할 수 없었다. 그는 몰래 그랜지를 계속 만들어냈다.

그랜지의 가치는 1962년 시드니에서 열린 와인박람회에서 인정받는다. 이곳에서 슈버트가 몰래 출품한 1955년산 그랜지 빈티지가 금메달을 획득한 것이다. 외국에서 온 와인 전문가들은 그랜지가 프랑스 등 와인 종주국 제품에는 없는 독특한 맛을 담고 있다고 평가했다. 호주 전문가들은 몰라본 독특한 호주의 와인 맛을 외국 전문가가 먼저 알아본 것이다.

그랜지는 호주 대표 포도 품종인 ‘시라’를 사용해 만든 것으로 산딸기향, 벌꿀과 자두 풍미에 다크 초콜릿 맛도 느낄 수 있다. 전체적으로 힘 있고 균형 잡힌 부드러운 질감을 가진 와인이다.

그랜지는 몇 년간 50개 이상의 금메달을 수상하며 미운 오리새끼에서 백조로 멋지게 탈바꿈했다.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는 그랜지를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뛰어난 레드 와인(1976년 빈티지)”이라고 극찬했다.

장기 숙성할수록 풍미가 더욱 깊어지는 그랜지는 전 세계 와인 애호가들이 소장용으로 갖고 싶어 하는 와인 중 하나다. 1951년 제품은 6000만∼7000만 원대에 거래된다. 전 세계적으로 소량 한정 생산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맛보기 쉽지 않은데, 통상 고급 호텔에서 120만∼150만 원에 판매된다.

멀리서 반짝이는 별만 보며 내 주위엔 명품이 없다고 생각된다면 이방인의 눈으로 주위를 한번 살펴보자. 무한한 가치를 숨기고 있는 흙 속의 진주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니.

김현지 기자 nu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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