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있게한 그 사람]강병화 고려대 교수, 야생자원식물종자은행 운영책임자

  • Array
  • 입력 2011년 12월 30일 03시 00분


코멘트

‘잡초박사’로 이끌어주신 벽안의 지도교수님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식물은 일요일이 없다”던 프란츠 뮐러 교수님이 계셨다. 그리고 내 모교 고려대가 있었다. 정년퇴임을 앞두고 인생을 되돌아보니 ‘잡초박사’로 불리기까지 혜택만 받고 살아 온 65년이었다.

고려대 농대를 졸업하고 농촌진흥청에서 잡초 방제를 연구하다 1979년 모교와 자매결연한 독일 호엔하임대로 유학을 가게 됐다. 그 시절 지도교수로 만난 분이 뮐러 교수님이다. 내 인생 여정을 결정한 분이기도 하다.

뮐러 교수님은 나보다 10년 선배였지만 나를 동료로 대하셨다. 실험실에 적응한 지 2개월쯤 지나자 교수님이 나를 연구실로 부르셨다. 제초제 5g과 작물과 잡초 6가지 종자를 100g씩 주면서 박사 학위를 위한 연구를 시작하라고 하셨다. 그때 하신 말씀이 ‘Pflazen haben keinen Sonntag(식물은 일요일이 없다)’였다.

교수님은 연구실 옆방의 자료실을 내게 내주셨다. 그리고 4년간 일요일 없이 연구실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그 곁에서 나도 쉬지 않는 독일병정이 돼 갔다. 매일 오전 7시에 출근하면 7시 반에 뮐러 교수님이 출근하시고 8시에 독일 학생들이 출근했다.

1983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공항까지 배웅 나온 교수님은 내가 유학생활 중 독일 구경을 못해 봤으니 3년 뒤 다시 초청하겠다고 하셨다. 하지만 2년 뒤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리고 2001년 7월 귀국 후 처음으로 독일을 찾아 교수님 묘소 앞에서 통곡을 했다.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고려대로 돌아온 1984년으로 다시 돌아가 얘기를 하면, 학교에 부임해 보니 실험실도 실험장비도 연구비도 없었다. 작물재배학과 잡초방제학을 강의했는데, 당시 우리 현실이 작물재배학은 강의실에서 교과서를 가지고 이론만 다뤘다. 잡초방제학은 논밭에 자라는 잡초를 제초제 처리로 방제하는 연구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유학시절 뮐러 교수님의 영향으로 잡초방제 연구에는 식물 종자가 중요하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지 않고 산과 들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실험 장비라는 게 카메라와 길이를 재는 자, 무게를 다는 저울만 있었기에 자연 상태에서 자라는 잡초와 재배 작물의 성장단계별 사진을 촬영하고 성숙한 종자를 수집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28년간 3880일의 야외 조사로 초본식물 1700종류에 속하는 7000점의 종자를 채종하고, 30만 장의 생육단계별 사진을 촬영했다. 그 자료를 한데 모아 15.5kg에 이르는 ‘한국생약자원생태도감’을 발행했다.

야외 조사를 위해 강의시간을 조정해 준 학교 당국과 오전 8시부터 시작하는 강의의 불편함을 감수해 준 제자들에게 고맙게 생각한다. 주중에는 이틀에 한 번꼴로 연구실을 비웠는데도 경고 한 번 하지 않고 교수의 자율성을 보장해 준 총장님들과 동료 교수들에게도 감사드린다. 그러고 보니 1979년 12월 뮐러 교수님 연구실에서 ‘식물은 일요일이 없다’는 말씀을 듣고부터 32년간 일요일을 쉬어 본 기억이 별로 없다. 3000여 일을 함께 다니면서 종자를 수집해 준 아내의 덕이라고 생각한다. 수백억 원을 투입해도 다시 확보하기 힘들고 우리나라에서 채종 가능한 초본식물의 90% 정도인 1700종류의 종자는 고려대에서 영원히 보존하고 이용하도록 약속해 주어 행복한 마음으로 학교를 떠난다. 경제적인 이유로 30만 장의 사진과 조사 자료를 정리할 공간이 없다는 것을 아신 김병철 고려대 총장님께서 개인 연구실을 총장 임기 때까지 내주어 근심 걱정이 없어졌다.

종자와 사진들은 우리나라 생물 다양성의 변화로 인해 다시 촬영할 수 없는 식물종도 많은 귀중한 자료다. 사진 정리가 완료되면 고려대 박물관에 보관해 후세 연구에 기여하고 싶다. 3년이 지나면 고려대에 입학한 지 50년이 된다. 반백 년을 모교의 그늘에서 살아온 셈이다. 비록 뮐러 교수님은 돌아가셨지만 앞으로 남은 삶은 모교와 국가를 위해 종자 연구를 하면서 살고 싶다.

강병화 고려대 교수, 야생자원식물종자은행 운영책임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