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있게한 그 사람]이석영 연세대 천문우주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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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1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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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일대 교정서 만난 세계 최고의 천문학자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어제 중학교 1학년인 어린 학생이 찾아와 내가 어떻게 천문학자가 되었는지 설문을 했다. 어릴 적 동방박사 이야기에 매료되던 것, 우주의 팽창 역사를 설명하는 빅뱅이론, 빛조차도 빠져나올 수 없는 블랙홀 등 생각의 한계를 넘나드는 학문에 대한 막연한 동경에 대해 두서없이 대답했다. 그런데 질문 하나가 나를 멈추어 생각하게 만들었다. ‘오늘 학자의 위치에 오기까지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이었나요.’ 답을 하다 보니 어느덧 20년 전 미국 유학시절로 시간의 화살이 돌아간다.

나는 초등학교 때 신문기사를 읽은 후 갖게 된 꿈을 따라 미국 예일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어린 나이에 더 어린 아내를 이끌고 유학길에 오른 나는 부모와 떨어지며 엉엉 소리 내어 우는 내 아내에게 “걱정 마. 내가 꼭 훌륭한 학자가 되어 자랑스러운 남편이 될게” 하며 큰소리를 탕탕 쳤다. 그런데 고풍스러운 예일대에서 발견한 내 참 모습은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거기서 나는 내 생애 가장 명석한 학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가 리처드 라슨 교수다. 그는 그의 논문에 대한 통산 피인용 횟수가 1만 회 이상을 기록하는,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천문학자다. 은하 형성 이론의 창시자인 라슨 교수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사실 나는 유학을 떠나기에 앞서 그의 논문을 거의 모두 읽었다. 그런데 직접 만나서 보니 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이었다. 명석할 뿐 아니라 생각의 깊이, 자연을 대하는 자세가 나와는 차원이 달랐다.

하루는 그가 걸어서 퇴근하는 모습을 길 건너서 보게 되었는데, 100m쯤 가다가 하늘을 보고 잠시 생각하고, 또 한동안 가다가 나무 잎사귀를 한참 들여다봤다. 만일 그가 과학자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정의된다면 나는 아니었다. 이러한 깨달음은 나름대로 훌륭한 학자가 되기 위해 첫발을 내디디는 천문학도에게 쓰리고 처참했다.

그 후 한두 해 동안 나는 과연 내가 태어난 목적에 부합하는 옳은 일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 회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부를 중단하는 것도 고려했을 정도였다. 그러다 큰 그림을 발견하고 돌파구를 찾게 되었다. 경복궁을 짓는 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필요했을까. 아마도 수천 명. 그중에서 경복궁을 설계하고 계획한 사람은 몇 명이었을까. 큰 그림을 그린 사람은 열 손가락 안에 들었을 것이다. 그 밖에 물길을 만들고, 기와를 만들어 놓고, 온돌을 마련한 사람은 또 얼마였을까. 수십 명 혹은 수백 명. 또한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사람이 벽돌을 만들고 나르고 쌓았을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의 사람들이 누구 하나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차이 없이 꼭 필요한 일을 했겠지. 아, 만일 라슨 교수가 은하 형성 이론의 큰 그림을 그리는 건축가라면 나는 그 그림을 이해하고 필요한 곳에 벽돌을 나르는 사람이 될 수는 있겠다 싶었다. 그런 자기 합리화가 만들어지자 다시 공부하는 것이 재미있어졌다.

인류가 삶의 답을 찾는 것은 비상구를 찾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위기의 상황에 수많은 문 가운데 삶의 길로 이끄는 몇 안 되는 비상구를 찾는 것은 어렵다. 참 비상구를 찾기 전에 아마도 여러 거짓 비상구를 먼저 열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참 비상구를 여는 사람만이 모두를 구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실패한 다른 시도들이 비상구를 찾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패는 없다. 인류의 이름으로 함께 이룩한다. 500년이 지난 오늘 경복궁을 누가 만들자고 했는지는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오직 그 시대의 선인들이 뜻과 힘을 함께 모아 이룩한 그 멋진 금자탑의 가치가 높이 드러날 뿐이다.

결국 나는 라슨 교수의 제자가 되지 못했다. 그 당시엔 여러 핑계를 찾을 수 있었으나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그의 제자가 될 만큼 준비되지 못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땅만 바라보고 벽돌을 나르며 20년을 살아온 후 오늘 나는 라슨 교수가 창시한 은하 형성 이론을 그가 이룩한 것보다 더 깊고 넓게 연구하고 있다. 문득 눈을 들어 경복궁을 보니 그 아름다움에 눈이 부시다.

이석영 연세대 천문우주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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