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이원복]고미술에 대한 목마름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1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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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복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이원복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지금 나는 일본 교토에서 도쿄로 달리는 신칸센 안에서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창으로 피라미드같이 듬직한 후지 산을 흘깃 보면서 어제 관람한 나라국립박물관의 제63회 쇼소인(正倉院) 전시를 떠올린다. 매회 새로운 소장품을 공개하는 60년 하고 3년이 지속된 소중한 전시다. 아울러 지난주 일요일 이에 지지 않는 간송미술관 주변 특별전을 보기 위해 묵묵히 기다리던 긴 행렬이 오버랩된다. 예년보다 더 많이 구름처럼 모여든 두 나라 군중에게서 경건함도 읽었다. 자연재해로 마냥 힘든 일본과 우리의 미래를 밝고 긍정적으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10월은 정녕 화사하고 화려한 달이었다. 불볕 아래서 농부들이 흘린 땀, 그 땀방울이 결실로 가시화되는 은총과 축복의 계절이다. 그러나 우리 농촌의 우울한 실상과 국내외 불투명한 경제 및 정치 때문에 배알 없이 흔쾌하게 즐거움을 구가하긴 어렵다. 하지만 이럴 때 우리는 더욱 의연하게 평상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투명한 공기와 쾌청한 날씨에 전국은 말 그대로 천자만홍(千紫萬紅), 무심한 자연경관도 그러하지만 각종 전시와 음악회 체육대회 등 문화행사는 우리를 달래며 지치고 찌든 일상에 흥과 생기를 준다. 우리 인간은 기쁠 때만 아니라 슬플 때도 술을 가까이 하며 노래를 부른다. 해서 새의 지저귐은 때로는 울음, 때론 노래가 된다. 춘향전 내 이몽룡의 풍자시 한 구절처럼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 높은 것’이런가. 전국이 떠들썩한 자못 술 취한 듯 고조된 분위기가 아닐 수 없다.

지친 일상에 생기 주는 문화행사

11월로 접어들어 가을이 중턱을 넘었다. 김장이며 연탄 등 겨울 채비가 예전같이 절실하진 않다. 일생이건 한 해이건, 대충 설렁설렁 살았건 최선을 다한 사람이건 모두 세밑을 맞는다. 소슬한 시절 해질 무렵 발아래 뒹구는 잎들을 만나면 ‘바보처럼 살았군요’ 유행가 가사가 가슴에 와 닿는다. 혼신의 힘을 다한 뒤 무대를 떠나는 배우의 심정처럼 조금은 공허하고 아쉬워 ‘텅 빈 충만’을 어느 정도 알 듯한 때이기도 하다. 허전함과 쓸쓸함, 그러나 한편은 잎 모두를 떨어뜨린 나무를 바라보며 등에 진 짐을 내려놓은 양 홀가분함과 자유를 맛보기도 한다. 해서 너나없이 조금은 너그러워지는 심적 여유가 주어지는 건 아닌지. 만추 때문만은 아니나 사람답게 사는 것과 잘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한 번쯤은 생각하게 된다. 이에 삶의 예술화와 함께 미술의 의미를 되새기게도 된다.

1979년 가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조선시대의 초상화’전을 열었다. 그 후 32년 만에 우리 것만이 아닌 중국과 일본, 그리고 서양 초상화까지 포함한 대규모 ‘초상화의 비밀’(9월 27일∼11월 6일) 특별전이 다시 열리게 되었다. 6주에 걸쳐 대성황을 이루었으나 아쉽게도 11월 6일, 내일이면 끝난다. 그러나 회화실에는 몇 년 만에 조선시대 문인화의 정수이자 백미로 상찬되는 김정희의 대표작 ‘세한도’가 현재 일반에게 공개돼 발걸음을 재촉한다. 이 계절에 정말 어울리는 그림이다. 불과 일주일 전 ‘중국 사행을 다녀온 화가들’(10월 27일∼2012년 1월 15일)을 통해 조용히 얼굴을 내밀었다. 그림만이 아닌, 청대 명사 16명의 제시까지 쫙 펼쳐져 입소문으로 관람객들의 발걸음이 줄을 잇는다. 계절적 요인도 없지 않으리라.

또 지금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오랜만에 조선시대 빛나는 대표적 명화를 모은 대규모 그림 전시인 ‘화원’이 열리고 있어 모처럼 우리 눈이 전에 없던 호사를 누린다. 마음이 넉넉하고 풍요로워진다. 특히 올해 전통미술 가운데 서화를 주제로 한 공사립박물관과 미술관의 여러 기획전이 돋보인다. 현재 강화역사박물관에선 ‘145년 만의 귀환, 외규장각 의궤’ 특별전(10월 25일∼11월 20일)이 개최되고 있다. 그 첫 전시 장소인 국립중앙박물관은 여름 잦은 비에도 불구하고 전시기간(6월 18일∼7월 17일) 내내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이는 2009년 가을 일본에서 잠시 귀국해 9일간 전시된 조선 초 최고의 명화인 ‘몽유도원도’ 열기에 버금가니 토요일은 관람객이 2만5000명을 넘기도 했다.

풍속인물전, 미술품열기 대미 장식

바야흐로 우리 미술품 열기의 절정으로 그 대미를 장식한 것은 다름 아닌 지난 일요일 끝난 간송미술관 81회 기획전인 풍속인물전이었다. 매년 봄 가을로 2주씩 특별전을 열어 개관한 지 만 40년 만이다. 전시 마지막 날엔 5시간 이상 기다려야 했다. 인류가 남긴 걸작과 명품은 그 안에 각 민족의 정서와 정체성이 담겨 있다. 우리 옛 그림은 맑고 밝은, 낙천적인 민족성을 일깨운다. 명품과의 만남은 이를 체득하는 것이다. 침묵의 기다림은 미래에 대한 가장 숭고한 사랑의 표현이 아니던가. 기다림은 꿈이 자라며 성숙이 진행 중인 고귀한 시간, 그래서 우리에겐 비로소 내일이, 미래가 존재한다. 겨울은 계절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는 기다림의 시간이다.

이원복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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