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훈 기자의 That's IT]새 카메라가 바꾼 세상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0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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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카메라를 손에 쥐었던 건 20년 전 중학생 시절이었습니다. 필름을 넣고, 셔터만 누르면 사진이 찍히는 올림푸스 자동카메라였죠. 경이로웠습니다. 동네 어귀마다 하나씩 있던 현상소는 늘 여행지의 추억을 되찾고 싶어 하는 손님들의 발길로 북적였죠. 하지만 불만이 있었습니다.

그때 찍은 사진을 들춰봤습니다. 우편엽서와 똑같은 구도로 중요한 풍경 앞에 서서 ‘내가 다녀갔다’는 기록을 남기기 위해 뻣뻣한 ‘V’자를 그리던 사진뿐입니다. 그땐 사진을 찍기 위해 ‘공식’이 필요했던 시기였으니까요. 필름값이 아까워 실수를 줄여야 했기 때문에 관광지에는 ‘사진 촬영하는 곳’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사진이 완성되는 과정은 더 황당했습니다. 노출이 어두운 사진은 현상소에서 제멋대로 밝기를 올려 물 빠진 사진처럼 만들어놓기도 했고, 배경을 살리려고 역광을 감수하고 인물을 그림자 속에 감춰놓으면 현상소 아저씨는 인물을 살려야 한다며 배경을 날려버렸습니다.

카메라는 세상을 보는 창입니다. 하지만 필름카메라 시절의 우리는 똑같은 구도로 세상을 보면서 똑같은 밝기로 세상을 받아들였고, 무엇이 더 중요한 피사체인지를 현상소 아저씨의 손에 맡겨야만 했던 겁니다.

디지털카메라의 시대는 모든 걸 바꿨습니다. 필름값 걱정이 사라지면서 구도와 자세도 자유로워졌고, 현상소가 사라지면서 촬영자의 의도도 살아남았습니다. 딱 10년 전, 코닥이 만든 디지털카메라를 샀을 때의 느낌이 기억납니다. 시선이 달라졌습니다. 거리에 구겨진 채 버려진 빈 콜라 깡통, 어둑어둑해지는 석양의 노을 비친 구름…. 디카와 함께 일상은 영화 같은 풍경이 됐습니다. 쉽게 지나치던 사물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고, 중요하지 않은 건 없다는 생각도 하게 됐습니다.

5년 전 또 한 번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캐논의 디지털 렌즈교환식 카메라(DSLR)를 산겁니다. 이 카메라로 만 5년 이상 사진을 찍었습니다. 10개국 이상을 함께 돌아다녔고, 1만 장이 넘는 사진을 찍었습니다. 일부는 신문에도 실렸고, 아내를 만난 과정과 아들이 커가는 모습이 이 카메라를 통해 기록됐습니다. 전문가들처럼 노출도 조정하고, 다양한 효과도 낼 수 있었습니다. 세상이 모두의 눈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기 시작한 거죠. 그 대신 너무 커서 늘 들고 다니기 힘든 게 문제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최근 5년은 늘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나갈 마음을 먹을 만큼 ‘특별한 순간’에만 ‘좋은 사진’이 나왔습니다. 카메라와 필름이 귀했던 20년 전과 오히려 비슷해졌던 것이죠.

지난주, 5년 만에 새 카메라를 샀습니다. 소니의 작고 가벼운 미러리스 카메라입니다. 성능은 DSLR와 비슷한데 크기는 절반도 안 됩니다. 동네 산책길에서, 출퇴근길에서 다시 사진을 찍는 재미가 생겼습니다. 우리 사회도 이렇게 발전하지 않았던가요. 모두가 똑같은 자세로 똑같은 풍경 앞에서 사진을 찍던 세상은 어느새 저마다의 자세로 각자의 이야기를 찍어내는 세상으로 바뀌었습니다. 물론 카메라의 발전이 세상을 바꾼 건 아닐 겁니다. 하지만 ‘좋은 사진을 위한 특별한 순간’만 기다리던 세상 대신 모든 순간이 특별한 세상이 더 아름다울 것 같습니다. 새 카메라를 만지며 세상의 시선이 훨씬 더 다양해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김상훈 기자 sanh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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