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박상우의 그림 읽기]가을, 마음의 여백에 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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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9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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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ling on the Golden Forest, 곽호진, 그림 제공 포털아트
Sailing on the Golden Forest, 곽호진, 그림 제공 포털아트
몇 년 동안 별러오던 집안 정리를 시작했습니다.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이리저리 방치했던 것들이 쌓이고 쌓여 삶의 터전을 잠식한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하나하나 이유와 명분을 지니고 있던 것들도 쌓이고 쌓이면 무관심의 덩어리가 되어 태산처럼 마음을 짓누르고 부담스럽게 합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것들은 공존이 아니라 대치의 형국으로 같은 공간에서 날카로운 신경전의 대상이 됩니다. 치워야지, 치워야지 마음으로 별러도 삶의 관성과 타성은 쉽사리 그것에 손을 댈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합니다.

어느 날 드넓던 서재가 책에 뒤덮여 발 디딜 틈이 없어졌습니다. 공간을 완전히 잠식당한 뒤에야 비로소 마음에도 여유가 남아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정면승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르러서야 인간의 타성과 관성은 흐름을 멈추고 자신의 처지를 정면으로 주시합니다. 그래, 이제 한계 상황이 되었어. 모든 일을 멈추고 당장 정리를 시작해.

항상 느끼는 일이지만 쌓일 대로 쌓인 것들은 단순한 방치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것은 물질의 누적이 아니라 마음의 분산을 반영하고 또한 투사합니다. 삶의 흐름을 멈추고 모든 걸 재정리할 필요가 생길 때는 언제나 인생의 분수령이거나 전환점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그래서 타성과 관성의 주체인 자신을 돌아보고 한숨을 내쉬면서도 일견 안도하게 됩니다. 방치된 것들을 정리함으로써 삶의 휴지기를 만들고 이전과 이후를 구분하고 모든 걸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리의 과정은 대부분 비워내고 버리는 일의 연속입니다. 당시에 나를 사로잡았던 것들, 그때 빛나고 아름다웠던 것들도 시간이 지난 뒤에 헛웃음을 짓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은 매순간 변하고 인생은 매순간 흘러 우주의 무한 변화에 상응합니다. 그렇게 쌓이고 쌓인 것들을 비우고 버리는 과정에서 부질없는 집착과 망상을 돌아보게 됩니다. 사로잡혔던 힘에서 풀려나고 중독되었던 힘에서 해방되는 순간 우리 영혼은 넉넉한 여백을 얻게 됩니다. 아, 왜 그렇게 바보처럼 살았을까.

미루고 미뤄오던 정리를 끝내고 깊은 밤 조용히 앉아 한껏 드넓어진 시공을 관망합니다. 물질로 켜를 이루고 산을 이루던 공간이 텅 비어 마음의 여백이 드넓어집니다. 시간과 공간의 정밀함에 심신을 드리우고 앉아 있노라면 먼 데서 갈대가 바람에 부대끼는 소리, 소나무 숲을 휩쓸고 가는 밤바람 소리가 되살아납니다. 막히고 겹치고 헝클어졌던 내면의 여백에서 우러나오는 소리, 잊고 살았던 감성의 정원에서 울려나오는 소리입니다.

가을이 오면 마음이 허전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것을 결핍이라고 생각하면 힘들지만 부질없는 것들을 버리고 비워 온전해진 마음의 형상이라고 생각하면 외려 만끽하고 즐겨야 할 마음의 형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문제는 부질없는 것이 너무 많이 누적되어 허전함조차 느끼지 못하는 마음, 다시 말해 정리가 필요한 마음입니다. 부질없는 것들을 버리고 비우는 가을, 허전한 마음의 여백을 만끽해 보세요.

박상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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