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rrative Report]1급 하반신마비 딛고 e스포츠 심판 된 고석찬 씨의 희망 찾기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8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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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신경조직까지 긁어내 버렸다, 16세의 절망… 복수만 생각한 시간들
우연히 마주친 그 미소 “혼자가 아니구나”… 나는 다시 세상에 서는 법을 배운다

《 아침에 눈을 뜨자 다리에 아무 감각이 없었다. 일어서려 했지만 가슴 아래 부분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다리가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고석찬 씨(23)에게 장애인으로서의 삶은 이렇게 갑작스레 시작됐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서 거대한 갈색 벌레로 변해버린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처럼 그가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그날부터였다.

지금도 날짜가 잊혀지지 않는다. 2003년 3월 24일. 태권도와 농구를 좋아했던 16세 고등학생은 그날 수술을 마친 뒤 1급 하반신 마비 장애인이 됐다.

허리가 아프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3학년이던 2002년 말. 걷고 뛰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가끔 전기가 허리를 관통하는 듯한 찌릿한 아픔이 느껴졌다.

고향인 전북 군산을 떠나 전주의 한 병원에서 진찰을 받았다. 자기공명영상(MRI) 촬영 결과 척추염 판정이 나왔다. 서울과 군산의 병원을 수차례 오가다 골반뼈를 떼어내 척추를 재생시켜 준다는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3시간이면 끝나는 간단한 수술”이라고 했지만 결국 다시 눈을 뜨기까지 12시간이 걸렸다. 의사는 척추 염증과 함께 석찬 씨의 신경 조직까지 같이 긁어내 버렸다. 》
○ 예고 없이 찾아온 장애

하반신 마비를 딛고 e스포츠 심판으로 활약하게 되는 고석찬 씨(23)가 태블릿 PC에 장애인 e스포츠 동호회 인터넷 카페 홈페이지를 띄우고 환하게 웃고 있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하반신 마비를 딛고 e스포츠 심판으로 활약하게 되는 고석찬 씨(23)가 태블릿 PC에 장애인 e스포츠 동호회 인터넷 카페 홈페이지를 띄우고 환하게 웃고 있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그는 걸어서 수술실로 들어갔다가 누워서 나왔다. 입학식만 하고 병원으로 직행했으니 고등학교 생활도 그때 끝났다.

꼬박 2년 동안 수술을 받은 병원 입원실에 누워 있었다. 매일같이 자신의 신경을 끊어버린 의사의 얼굴을 마주했다. 의사는 2년 동안 단 한 번도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다. 부모는 그에게 “회복되고 있으니 조금만 더 참자”고 했지만 이미 끝나버린 것을 고 씨도 알았다. 가슴 아래를 아무리 때리고 꼬집어도 아프지 않았다. 어떻게 해도 죽은 신경조직은 되살아나지 않았다. 1년을 앓고 나서 의사는 그에게 “평생 일어설 수 없다”고 통보했다.

“그때부터 계속 복수만 생각했습니다. 날 이렇게 만든 사람을 칼로 찔러 죽일지, 목을 졸라 죽일지…. 하지만 일어설 수조차 없었으니…그저 망상일 뿐이었죠.”

○ 육체에 갇히다

장애는 퇴원 이후 그를 더욱 짓눌렀다. ‘인간다운 삶’은 기대할 수 없었다. 갓난아이처럼 모든 것을 다시 배워야 했다. 가장 힘든 것은 배변이었다. 고 씨는 어디를 가든 바지 허벅지 안쪽에 작은 소변 비닐가방을 차고 다닌다. 하반신에 감각이 없으니 소변이 마렵다는 느낌도 없다. 그는 “알지도 못하는 사이 (소변이) 줄줄 흘러내린다”고 했다. 소변으로 다리가 젖어버려도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대변은 더 큰 문제다. 이틀에 한 번씩 똑같은 시간에 변기에 앉는다. 그리고 항문 주위를 문지르는 ‘항문 자극’을 한다.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몸을 ‘이틀에 한 번’이라는 생체 리듬에 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설사로 바지가 온통 젖어버린 일도 있었다.

외출하는 것조차 힘겨운 일이었다. 장애인이 되기 전까지 사람들의 ‘시선’이 그렇게 무서운 줄 몰랐다. 어디를 가도 자신을 쳐다보는 눈길이 낯설고 따갑게 느껴졌다. 당당하고 활기찬 장애인의 모습은 먼 나라 이야기였다. 혼자 남았다는 생각은 그를 더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었다. 눈을 감을 때마다 건강하고 친구들에게 둘러싸인 자신의 옛 모습만 떠올랐다. 고 씨는 점점 더 장애를 겪는 자신의 육체 속에 그렇게 갇혀 가고 있었다.

○ 목을 매다

집으로 돌아온 지 1년이 지난 2006년 초, 고 씨는 끝내 목을 맸다. 죽이고 싶은 사람을 죽일 수 없으니 자신이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 그 줄은 왜 방 안에 있었는지…. 책상 한구석에 있던 끈을 방문 손잡이에 묶고 줄 반대편을 목에 감았다. 1m 남짓한 높이지만 하반신을 전혀 쓸 수 없는 고 씨에겐 휠체어에서 떨어지는 것만으로도 죽음을 맞을 수 있었다.

그때 아버지가 방문을 열었다. 목에 줄을 맨 장남의 모습에도 아버지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눈이 마주치고 서로의 눈빛이 흔들리는 순간, 아버지는 말없이 방을 떠났다. 고 씨는 홀로 남은 방에 앉아 몇 시간 동안이고 울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병간호를 위해 사업을 그만뒀다. 고 씨는 이후에도 방문을 나서지 않았다. 커튼을 쳐 캄캄해진 방 안에서 하루 18시간씩 컴퓨터 게임에만 몰두했다. 밥도 혼자 먹었다.

자살을 시도하기 전까지는 “정신은 멀쩡하니 똑바로 살아야 한다”고 하던 부모님도 이제는 “살아만 있어 달라”고 부탁했다.

○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2006년 4월 20일 혼자 TV를 보던 고 씨는 충격을 받았다. 장애인의 날인 그날 자신과 똑같은 하반신 마비 장애인이 평범하게 일상생활을 하고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학교에 가고, 직장을 다니고, 외식도 하고….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 들더군요. 그동안 나 스스로를 방 안에 가둬놓았던 거예요.”

자립을 결심한 그는 몇 개월 동안 부모를 설득했다. 여름이 되어서야 그는 서울의 국립재활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곳에는 고 씨와 똑같은 처지의 장애인이 20명 넘게 생활하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모와 떨어졌지만 장애인들의 ‘동질의식’이 오히려 치유에 도움이 됐다. 동지와 함께 혼자 몸을 씻는 법, 배변훈련, 쇼핑하는 방법까지 배웠다. 운전면허를 딴 것도 그때였다.

인터넷도 고 씨에게는 ‘구원의 힘’이 됐다. 그가 미소녀와 게임 캐릭터를 주제로 만든 ‘오타쿠(한 가지 일에 지나칠 정도로 열광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일본어) 블로그’. 하루 1만 명 이상이 찾아 지금까지 총 280만 명의 방문객 수를 기록할 정도로 높은 인기는 그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확인시켜줬다.

하반신 마비라는 장애가 나만의 불행이 아니란 사실, 그리고 인터넷을 통해 발견한 삶의 이유를 깨달으면서 마음을 꽁꽁 묶어놓았던 족쇄는 그렇게 풀려갔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문제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렇게 긴 시간이 걸렸다.

○ e스포츠 심판은 나의 운명

인터넷 게임은 그에게 장애 여부를 묻지 않았다. 장애인에게 게임만큼 중독성 있는 놀이는 없다. 몸이 불편하고 심리적으로 위축되다 보니 게임 공간으로 쉽게 빠져드는 것이다. 고 씨도 마찬가지였다. 입원 중인 병원에서 집으로 외박을 나와 꼬박 4일 동안 한숨도 자지 않고 게임에 빠진 적도 있다. 병원으로 돌아와서는 인공호흡기를 달고 꼬박 이틀간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그 게임이 고 씨에게 새로운 삶을 찾아줬다. 그는 스타크래프트, 워크래프트3, 카트라이더 등 국내의 대표 인터넷 게임 상위권에 이름을 올린 ‘오타쿠’답게 게임개발자가 돼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때부터 게임에 쏟던 시간을 공부하는 시간으로 돌렸다. 어렵게 검정고시에 합격한 뒤 지난해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에 입학했다. 자신만의 게임 스토리를 만들겠다는 꿈을 그렇게 키워간 것이다.

기회는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지난달 22일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산하 고용개발원과 대한장애인e스포츠연맹이 고 씨를 비롯한 장애인 11명을 선발해 교육한 후 처음으로 3급 심판 자격을 준 것이다. e스포츠 업무는 장애인들에게 적합한 일이지만 정식 직업으로 만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고 씨는 다음 달 20일부터 24일까지 제주에서 열리는 제1회 국제장애인e스포츠대회 심판으로 활동하게 된다. 까다로운 게임 규정을 익히고 3개월이 넘는 교육도 받아야 하지만 자신을 되찾은 그는 지금 행복하다. 장애인 대회로 시작했지만 언젠가는 비장애인 대회에서 심판으로 나서는 것도 꿈꾸고 있다.

그는 “장애인을 위한 e스포츠 직업이 많이 생긴다면 방 안에서 컴퓨터만 하고 있는 수많은 장애인들도 밖으로 나올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장애를 이겨낸 소중한 경험을 다른 장애인과 나누고 싶은 것이다. 또 그는 “장애인 인권 향상을 위해 이 분야에 대한 공부도 해보고 싶다”고 했다. 스스로를 가둔 채 남을 저주하던 장애인 고석찬 씨는 그렇게 ‘마음의 휠체어’에서 일어나 두 발로 당당하게 섰다.

○ 취재 후기

고 씨는 취미를 직업으로 만들었지만 분명 운이 좋은 경우다. 대다수 다른 장애인은 여전히 직업교육을 마친 채 의무적으로 생산직군에 취업하거나 직업 없이 수당만으로 생활하고 있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의 2010년 장애인경제활동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 장애인 고용률은 36%에 불과하다. 그중 농업 임업 어업 등 1차 산업에 종사하는 비중이 19%나 된다. 반면에 비장애인의 1차 산업 종사 비중은 7.3%였다. 공단 측에서는 “그나마 장애인들이 차별받지 않는 일이 농사일이라서 농업 종사 비중이 비장애인보다 높다”고 말했다.

최초의 장애인 e스포츠 심판이 출현하는 우리 사회의 다른 이면에는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여전하다. 이 간극을 줄이는 것은 비장애인의 몫이다.

박재명 기자 jm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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