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를 통해 본 대한민국 근현대사]<18>체육행사로 겨레의 얼 일깨우다

동아일보 입력 2010-11-22 03:00수정 2010-11-22 14:13
공유하기뉴스듣기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1920년대 잇단 전국대회 창설… 스포츠 코리아 초석 닦았다
일제강점기와 경제부흥기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는 동안 동아일보가 주최한 각종 스포츠 행사는 민족의 역량을 결집하고 체육계의 인재를 한발 앞서 가려내는 공공의 장이었다. ① 1923년 제1회 전국여자연식정구대회에서 머리를 길게 땋은 채 입장한 선수들. ② 1936년 독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하고 있는 손기정. 그는 1933년 동아마라톤에서 1위를 차지하며 파란을 일으켰다. ③ 1980년 61회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 결승전. 당대의 라이벌로 꼽힌 선린상고와 광주일고가 대결했다. ④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자유형 400m 금메달리스트인 ‘마린 보이’ 박태환 선수.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동아수영대회를 휩쓸며 유망주로 떠올랐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창간 당시부터 민족의 역량 제고에 힘을 쏟았던 동아일보는 사세가 안정되면서 곧바로 체육 활동을 통한 민족혼 고취와 사회계몽에 눈길을 돌렸다. 1923년 여자정구대회를 창시한 것을 시작으로 1926년 4개 구락부 야구연맹전, 1929년 조선수영경기대회, 1931년 마라손(마라톤)경주대회를 잇달아 주최하며 근대 스포츠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 이 4개 대회는 오늘날에도 동아일보기 전국정구대회,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동아수영대회, 서울국제마라톤으로 이어지며 최고(最古)의 역사를 지닌 최고(最高)스타의 산실로 자리매김했다.》

1931년 3월 20일 동아일보에는 ‘경영(京永·서울∼영등포)가도(街道) 오십리 장쾌할 명일의 경주’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동아일보와 조선체육회가 공동 후원한 ‘제1회 마라손(마라톤)경주회’로 이는 오늘날 ‘민족의 레이스’이자 ‘세계의 레이스’로 성장한 서울국제마라톤의 효시였다.

1932년 제2회 대회에는 신의주에서 온 신예가 2위에 올라 주목을 끌었다. 장거리계 최강자였던 변용환에 이어 골인한 손기정이었다. 이듬해 3회 대회에서 그는 유해붕과 막판 접전을 벌인 끝에 극적으로 1위에 골인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의 쾌거를 예고하는 국민 영웅 탄생의 신호탄이었다.

일제의 동아일보 강제폐간 후 어수선한 해방 정국과 6·25를 겪으며 열리지 못했던 동아마라톤은 1954년 25회 대회로 당당히 부활했다. 1964년 35회 대회부터는 42.195km의 풀코스 대회로 면모를 갖췄다.

주요기사
이때부터 동아마라톤은 기다렸다는 듯이 신기록의 산실로 자리매김했다. 36회 대회에서 이명정이 2시간21분21초6으로 이전 기록을 5분 이상이나 앞당겼다. 1966, 70, 73, 74년 등 1∼4년마다 한국기록을 단축해온 동아마라톤은 1987년 58회 대회 때는 이종희 허의구 김원탁 등 무려 5명이 한꺼번에 한국기록을 깨기도 했다. 김완기는 1990년 61회, 1993년 64회 대회에서 거푸 한국신기록을 갈아 치웠다. 1983년부터는 여자부 대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몬주익 언덕의 신화’를 이뤄낸 황영조는 한 해 전인 1991년 처음 출전한 동아마라톤에서 3위를 차지하며 젊은 기대주로 떠올랐다.

1993년 고도(古都) 경주로 무대를 옮긴 동아마라톤은 이듬해 65회 대회부터 국제대회로 승격해 ‘동아국제마라톤’이라는 또 하나의 이름을 갖게 됐다. 마스터스 마라톤도 이해에 도입해 오늘날 매년 2만 명 이상이 참가해 승부를 뛰어넘는 축제의 장을 펼치고 있다.

1995년 대회에서는 이봉주라는 새로운 국민 영웅이 탄생했다. 영국의 네루카를 5초 차로 누르고 우승한 그는 1996년 여름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따내며 또 하나의 마라톤 신화를 썼다.

1996년 대회부터는 ‘1m 1원’ 운동이 전 사회적 관심을 끌었다. 참가자가 달린 거리를 m당 1원으로 환산해 자신이 미리 정한 후원자로부터 기부금을 받은 뒤 이를 모아 백혈병 어린이를 돕는 것이다. 이 운동은 자신의 노력으로 다른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사랑의 향기를 퍼뜨리고 있다.

2000년 새 밀레니엄과 함께 동아일보가 광화문 시대를 다시 열면서 동아마라톤은 서울로 돌아왔다. 2004년에는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세계에 알리는 ‘서울국제마라톤’ 명칭이 추가됐다. 2010 서울국제마라톤대회 겸 제81회 동아마라톤은 국내에선 처음으로 국제육상경기연맹(IAAF) 최고 등급인 골드라벨 대회로 치러졌다. 2009년 기준으로 전 세계에서 열리는 여러 마라톤대회 중 불과 11개 대회만 획득한 까다로운 인증 조건을 통과한 것이다. 3월 21일 열린 이 대회에선 세계기록에 근접한 2시간6분대 기록이 탄생했다. 케냐의 실베스터 테이멧이 2시간6분49초로 결승 테이프를 끊었다.

동아수영대회는 동아마라톤보다 2년 앞선 1929년 9월 1일 경성제대(서울 종로구 동숭동) 수영장에서 동아일보 주최로 열린 제1회 조선 수영경기대회가 효시다. 대회가 열리자 전국의 대표급 수영 선수와 관계자가 모여들었고 이는 같은 해 8월 조선수영구락부(현 대한수영연맹)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1979년까지 전국남녀학생수상경기대회로 열리다가 1980년부터 동아수영대회로 바뀌었다. 1970년대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 1980년대 ‘아시아의 인어’ 최윤희 선수 등이 모두 이 대회를 통해 발굴됐다.

2001년 부산 사직실내수영장에서 열린 제73회 대회에서는 초등부 자유형 100m와 200m를 12세 박태환 선수가 휩쓸었다. 3년 뒤인 2004년에는 자유형 200m와 400m에 출전해 2관왕에 올랐고 이어 경기고 1학년 때인 2005년에는 200m(1분50초1)와 400m(3분50초37)에서 연거푸 한국신기록을 세우며 대회 최우수선수에 선정됐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자유형 400m 금메달의 쾌거를 이룩했고 올해 광저우 아시아경기에서 아시아경기 2회 연속 3관왕의 기록을 쌓은 ‘마린보이’는 이렇게 동아수영대회와 함께 성장했다. 광저우 아시아경기 여자 평영 200m 금메달의 주인공 정다래도 2007, 2008, 2009년 3년 연속으로 동아수영대회 여고부 평영 200m를 제패하며 ‘차세대 인어’로 일찌감치 인정받았다.

동아일보가 창설한 최초의 체육대회는 1923년 6월 30일 서울 경성제1여고(현 경기여고) 운동장에서 열린 제1회 전국여자연식정구대회였다. 스포츠를 넘어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해 개최한 사회적 캠페인이었다. 오늘날 동아일보기 전국정구대회가 된 이 대회는 2006년부터는 남자 선수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하면서 명실상부한 한국 정구의 산실 역할을 하고 있다.

1947년 첫 팡파르를 울린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는 고교야구의 최강자를 상징하는 한국 야구의 살아있는 역사로 꼽힌다. 1926년 항일의지 고취를 위해 창설한 4구락부 연맹전(경신 배재 중앙 휘문)이 모태다. 2007년까지는 지역 예선을 거친 팀과 그해 성적이 우수한 팀을 초청하는 지구별 초청대회 성격으로 개최됐지만 2008년부터는 전국 고교야구 모든 팀이 참가하는 대회로 바뀌었고 시즌을 시작하는 고교 전국대회가 됐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 “한번 국수는 영원한 국수” 국수전, 한국바둑 이끌다 ▼
1956년 첫 정규신문기전 창설

1956년 창설된 국수전의 역사는 한국바둑의 역사와 궤를 같이했다.

최초의 정규 신문기전으로 현대바둑 발전의 초석을 놓았고 매회 국수에 오른 기사는 당대 일인자로 평가됐기 때문이다. 조남철 김인 조훈현 이창호 이세돌 등 한국바둑의 계보를 잇는 일인자들은 전성기 때 예외 없이 국수위를 갖고 있었다.

신문에 정기적으로 기보를 싣는 것이 생소하게 느껴지는 시절. 국수전의 출범은 바둑계 발전을 위한 결단이었다.

국수전의 산파 역할을 한 고 조남철 9단은 1기 우승을 차지한 뒤 9연패를 기록했다. 국내 바둑의 기틀을 마련했던 조 9단은 ‘바둑을 가장 잘 두는 사람의 대명사’로 꼽혔다. 애기가들은 대마 목숨이 위험할 때 “이 사람아, 그건 조남철 9단이 와도 못 살리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던 조남철 왕국도 일본 유학 후 돌아온 김인 9단(당시 6단)의 두터움에 맥없이 무너졌다. 김 9단은 40연승 등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며 일인자다운 면모를 보여줬고 1966년 제10기부터 국수전을 6연패했다.

잠시 윤기현, 고 하찬석 국수가 2년씩 국수위에 오른 뒤 새로운 황제 조훈현 9단이 나타났다. 9세에 입단한 후 천재 기사 소리를 들으며 일본 유학을 다녀온 그는 최고위전에 이어 1976년 제20기부터 국수전을 접수하며 1인 독주체제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조 9단은 1986년 서봉수 9단에게 질 때까지 10연패의 신기록을 세웠다.

1990년엔 15세 소년의 일인자 등극을 알리는 팡파르가 울려 퍼졌다. 이창호 9단은 1989년 도전 실패를 딛고 제34기 도전기에서 조훈현 9단을 3-0으로 셧아웃 시키며 그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보여줬다. 이후 20년 동안 이 9단은 타이틀을 간간이 빼앗길 때도 있었지만 언제나 다시 되돌아왔다. 지난해에도 국수를 되찾으며 총 10회 우승을 기록했다.

이세돌 9단은 2007년 51기와 이듬해 52기를 잇따라 우승하며 ‘일인자=국수’의 공식을 이어갔지만 휴직으로 타이틀을 반납하는 아픔이 있었다. 이세돌 9단은 올 국수전에서 4강에 올라 명예회복을 노리고 있다.

이 밖에 서봉수 9단, 루이나이웨이 9단, 최철한 9단, 윤준상 8단도 국수 등극에 성공했다.

서 9단은 일본 유학파가 아닌 기사로는 처음으로 국수에 올랐다. 1999년 한국 바둑계에 입성한 루이 9단은 1년도 안된 같은 해 여성이자 외국인으로는 최초로 43기 국수를 차지했다. 최 9단은 2004년 당시 후배 기사한테 한 번도 타이틀을 빼앗긴 적이 없던 이창호 9단을 상대로 우승한 뒤 방어에도 성공했다. 윤 8단의 이창호 9단 격파도 신선한 바람을 불렀다.

한번 국수는 영원한 국수. 다른 기전과는 달리 국수전은 한 번이라도 타이틀을 딴 기사는 성 뒤에 ‘국수’를 붙여 호칭한다. 올해 54기를 맞은 국수전은 이창호 국수에게 도전할 기사를 고르고 있다. 앞으로도 국수전은 한국바둑계를 이끌 동량을 품고 갈 것이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0 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댓글쓰기 Copyright ⓒ 동아일보 & donga.com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기사 의견 0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