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인준 칼럼]‘자부심을 갖되 자만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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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3월 10일 2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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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고전(苦戰)과 한국의 선전(善戰)이 자주 화제에 오르는 요즘이다. 일본 언론은 “한국을 배우자”고 하고, 한국 언론은 ‘그늘 드리운 일본’을 전한다. 밴쿠버 올림픽 뒤끝이라 더 그런 것 같다.

13년 전의 ‘경제 국치’ 잊으면 안 돼

‘한국을 치켜세우는 달콤한 말에 담긴 거품부터 빼야 한다’는 생각이 스친다. 그리고 ‘일본은 아직도 강하다. 만약 중국 경제가 일방적으로 팽창하는 가운데 일본이 더 위축된다면 한국도 편할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싶다.

각국의 경제 부침사(浮沈史)는 지구상에 자만할 수 있는 나라는 없음을 일깨운다. 우리 국민은 1970, 80년대 고도성장기를 거치면서 외국에 나가 돈 쓰는 맛도 알게 됐고, 중국 동남아 등에선 팁의 단위를 높여놓았다. 그런 거품을 물고 우리가 맞은 것이 1997년의 환란(換亂)이다. ‘한강의 기적’은 온데간데없고 외환위기로 국가부도(不渡)의 벼랑 끝에 매달려있는 우리를 발견했을 때 참으로 암담했다.

한국인이라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100년 전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경술(庚戌) 국치만이 아니다. 13년 전 그해 12월 3일, 570억 달러를 지원받기 위해 국제통화기금(IMF)에 경제정책의 조종간을 맡겨야 했던 ‘경제 국치’를 망각해선 안 된다. 애걸하는 눈빛으로 IMF와 미국과 일본에 선처를 빌어야 했던 우리다. 역시 조금 잘나간다 싶을 때 더 조심해야 한다.

모리타 아키오 소니 창업자와 이시하라 신타로 현 도쿄도지사가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라는 책을 낸 것은 1989년이었다. 그때 일본의 기세는 새로운 패권국가의 등장이 눈앞에 다가온 것 같은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일본이 미국의 자산을 무더기로 사들이던 모습은 승전국 미국에 복수라도 하는 듯했다.

1993년 오자와 이치로 당시 집권 자민당 간사장이 ‘일본개조계획’이란 책을 쓸 때만 해도 일본이 세계 2대 경제대국의 자리에서 내려올 날이 있으리라는 상상은 못한 것 같다. 그는 일본이 ‘경제 빅2’에 걸맞은 나라가 명실상부하게 돼야 한다고 설파하면서 패전의 족쇄를 끊어낸 ‘큰 보통국가 일본’을 그렸다.

그 오자와가 작년 12월엔 집권 민주당의 간사장으로 국회의원 143명을 비롯해 무려 630명의 초대형 방문단을 이끌고 중국에 갔다. 초중학생 수학여행단도 아니고 명색이 아시아 유일의 고도선진국 집권당이 중국을 향해 이런 ‘애교 만점의 퍼포먼스’를 보인 것은 중국의 힘 때문이다. 오자와는 “일중(日中) 친선을 위한 우리의 노력을 중국 측도 알게 됐을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중국을 떠나 한국으로 건너왔는데, 방한 일행은 비서관 경호원 등 수행원 3명이 전부였다.

중국도 일본도 넘기 어려운 벽

오자와에 뒤이어 중국의 차기권력 시진핑 국가부주석이 한국에 왔다. 우리 정부는 중국 현재권력 서열로는 6위인 그를 국빈 수준의 의전과 예우로 맞았다. 거기에도 중국의 힘이 실려 있었다.

우리가 외환위기를 맞기 1, 2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은 한국한테서 배울 게 있다며 가끔 머리를 숙였다. 당시 우리 당국자들이 중국 측에 ‘외환의 적정관리’에 관해 강의까지 한 적도 있다. 나중에 보니 낯 뜨거운 자만이었다. 밴쿠버 올림픽 때는 메달에 웃고 울었지만 성화가 꺼진 뒤엔 중국 정부의 경제정책 발표에 일희일비하고 있다.

국내 일부 전문가는 “그래도 첨단 분야에서는 중국이 우리를 따라오는 데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먼먼 옛날 쌀 한 톨을 잘라 그 위에 반야심경 글씨를 다 새겼다는 중국이다. 드디어 올해는 후진타오 국가주석과 원자바오 총리 등 지도부가 ‘제조(製造)의 중국’을 넘은 ‘창조(創造)의 중국’을 경제정책 비전으로 내세우기에 이르렀다. 자주창신(自主創新·모방에서 탈피해 스스로 새로운 것을 창조함)에 대한 자신감이 배어있다.

일본도 밴쿠버 빙상에선 아사다 마오가 김연아에게 졌지만 무역에선 한국에 대한 흑자를 끝없이 쌓고 있다. 우리가 올림픽에 취해 있던 지난 2월에만도 대일 무역적자는 30억 달러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일본의 정체(停滯)와 퇴보를 낳는 요인들도 비슷하게 끌어안고 있다. 수출은 잘하는데 내수(內需)는 키우지 못하는 체질, 재정 악화 패턴, 저출산과 고령화,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고용구조, 워킹푸어(일은 한다지만 가난은 못 벗는) 계층의 확대 등이 그렇다.

작년 시진핑이 방한했을 때 그의 인생훈(訓)이 무언지 알게 됐다. 첫째는 ‘자부심을 갖되 자만하지 말자’이고, 둘째는 ‘의욕을 갖되 떠벌리지 말자’이며, 셋째는 ‘일에 힘쓰되 경솔하지 말자’라고 한다. 누구나 그 정도는 알 만하다 해도, 개인이나 국가나 이런 평범한 교훈을 잊는 바람에 사고도 치고 경제도 망친다.

배인준 주필 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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