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식 칼럼]한중일 新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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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2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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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선비 이덕무는 1778년 중국에 파견되는 사절단을 따라 처음 중국 여행을 했다. 그는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일 압록강을 건너면 이제 정말 중국 땅에 들어섭니다. 생각만 해도 유쾌합니다’라고 적었다. 조선의 지식인에게 중국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중국에 가면 새로운 지식과 문물, 기술을 접할 수 있고 뛰어난 학자를 만날 수 있었다. 이덕무의 편지에는 중국 땅에 막 첫발을 내딛기에 앞서 느꼈던 감격스러움이 묻어난다.

문명의 중국, 경제의 일본

역시 조선의 선비인 강홍중은 1624년 조선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그는 일본을 목격한 뒤 복잡해진 감정을 이렇게 기록했다. ‘일본의 시장에는 물화(物貨)가 산처럼 쌓여 있으며 여염집에는 곡식이 널려 있으니, 그 백성의 부유함과 물자의 풍성함이 우리와 비교가 안 되었다.’ 일본을 ‘섬 오랑캐’의 나라로 알고 갔다가 높은 경제력을 보고 부러웠던 것이다.

중국은 우리에게 대대로 ‘세계의 중심’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중국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사대주의’라고 비웃지만 정확히 말하면 선진 문명에 대한 동경이었다. 우리보다 앞선 나라에 대해 알고 싶고, 닮고 싶은 그런 마음이었다. 게다가 중국은 거대한 땅과 인구, 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었다. 일본은 경제력 면에서 조선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 사이에 위치한 한국도 중요한 장점을 갖고 있었다.

1123년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은 ‘고려도경(高麗圖經)’이라는 기행문을 썼다. 그는 고려의 문화 수준에 놀랐다. ‘고려왕이 갖고 있는 책이 수만 권에 이르며 누추한 거리에도 책을 파는 곳이 두셋씩 마주보고 있다. 결혼하지 않은 자녀는 함께 거처하면서 스승을 좇아 경서를 익히며 조금 더 커서는 벗을 골라 공부를 한다. 아래로는 평민의 어린아이들까지도 선생을 찾아가 배운다. 아 훌륭하구나.’

1866년 강화도를 습격해 외규장각 도서를 강탈해 간 프랑스의 군인들은 고향에 돌아가 비슷한 보고서를 남겼다. ‘조선인의 집을 뒤지다 보니 가난해 보이는 데도 집집마다 서고가 있고 책이 가득 차 있어 자존심이 상했다.’ 한국이 역사적으로 중국이라는 ‘블랙홀’에 휩쓸려 들어가지 않고 정체성을 지키며 꿋꿋하게 생존해온 비결 중 하나가 문화경쟁력이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오늘날 우리의 교육열이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오고 있음도 짐작할 수 있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중국의 도약이 한국 일본은 물론 강대국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올 들어 9월까지 중국의 해외 수출액은 8467억 달러로 세계 1위를 차지했다. 일본은 4057억 달러로 세계 4위, 한국은 세계 9위로 2601억 달러를 기록했다. 인구 규모로 보아 한국이 중국 일본과의 격차를 줄일 수는 있어도 추월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전까지 중국의 침체가 비정상적인 것이었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것일 뿐이다. 한국 중국 일본의 신(新)삼국지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한국은 지식과 문화로 어깨 겨뤄야

초강대국 중국을 숙명처럼 곁에 두고 살아온 우리 선조들은 지식과 학문을 앞세우고 문화 수준을 부각하는 방식으로 대처해 왔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 대해서는 낮게 보면서 사라진 중국 문화의 전통을 우리가 잇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졌다. 조선 후기의 ‘소중화(小中華)’론이 그것이었다.

오늘날 중국은 풍부한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아직 ‘문화국가’로 보기는 이르다. 한류 열풍을 보아도 문화적 우위가 얼마나 의미 있는 것인지 알 수 있다. 난감하기 짝이 없는 중국의 위세 앞에서 지력(知力)과 문화를 생존 무기로 삼았던 선조들의 전략은 아직도 유효하다. 우리의 문화경쟁력이 어느 수준에 와 있는지 꼼꼼히 살펴야 할 때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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