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인준 칼럼]면면히 이어지는 반대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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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2월 2일 2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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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작년 11월 당선 후 첫 방송인터뷰에서 “FDR(프랭클린 D 루스벨트 전 대통령)에 관한 신간을 읽고 있다”고 밝혔다. 그 책 중 하나가 마셜대 교수 진 에드워드 스미스가 쓴 ‘F.D.R.’이었는데, 스미스는 올 9월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루스벨트는 화합자(Uniter)가 아니라 위대한 분열자(The Great Divider)였다”고 규정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뉴딜정책을 초당적 화합과 지지 속에서 추진했다는 것은 미신이다. 대통령에게 은행폐쇄권을 부여한 긴급은행법을 제외한 1930년대의 주요 법안은 대부분 공화당의 강경한 반대 속에서 통과됐다. 루스벨트는 ‘다수결 원칙이란 반대파의 허락을 받는 게 아니다’고 믿었다. 그는 반대파를 무시하거나 내버려두고, 오히려 반대파의 증오심을 자신에 대한 국민지지도를 높이는 데 활용했다. 국정은 결국 선택이며 선택엔 반대가 따른다는 것을 알고, 그 반대까지도 과정의 하나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는 다만 국민의 절반 이상이 자기편이 되도록 힘썼으며, 여당의 동의를 구하기 위해 (여당 사람들에게) 비굴하게 굽실거리기까지 했다.”

스미스는 “오바마 역시 공화당의 지지를 받지 못한 채 의료개혁을 하더라도 그것은 국가에 남을 의미 있는 개혁(법)이다”고 덧붙였다.

반대에 굴복했다면 기적 없었다

오바마가 국정 핵심과제로 추진하고 있는 미국 의료개혁은 공공의료보험(퍼블릭 옵션) 도입이 최대 쟁점인데, 세금부담 증가를 싫어하는 계층과 공화당(야당)의 반대가 심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문제 때문에 야당이 국회를 마비시키는 일은 없다. 이것이 우리 여의도 국회의사당 풍경과 다른 점이고, 미국의 데모크라시와 한국의 민주주의가 100% 동의어(同義語)가 아님을 말해준다.

‘반대의 추억’은 우리나라에도 셀 수 없이 많다. 정치적 반대의 전통이 면면히 흐르고 있다. 1967년 박정희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 건설 구상을 밝힌 뒤에 쏟아진 반대 주장을 다시 들춰보는 것은 진부하지만, 지금도 40여 년 전 수준의 상투적 반대가 판을 친다.

그때도 편 가르기 수법의 반대론이 있었다. ‘소수 귀족들의 자가용 향락을 위한 도로’라는 것이었다. 경부고속도로가 전국 고속도로망 시대를 열어젖히고, 자동차산업을 비롯한 산업화와 수출대국화의 동맥이 됐으니 가소로운 반대론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엔 ‘부자들이 기생 태우고 놀러 다니는 꼴이나 보란 말이냐’ 하는 원초적 선동의 혹세무민 효과가 적지 않았다.

“쌀도 모자라는데 웬 고속도로냐”와 같은 반대론도 당장 한 끼가 급한 국민소득 100달러 시대엔 상당한 호소력이 있었다. 더 많은 쌀(국부·國富)을 창출하기 위해서도 고속도로가 필요하다는 설명은 감성적인 반대 구호를 압도하기 어려웠다. 지금도 “복지 대신 4대강이 웬 말이냐”는 식으로 들이대니 헷갈려하는 국민이 생긴다. 그러나 고속도로가 경제발전의 기반이 돼 국민의 먹을거리를 제공했듯이, 전국 강의 재생이 국민 삶의 질을 높이는 복지로 이어진다면 ‘복지와 4대강’은 제로섬 관계가 아니다. ‘쌀이냐, 고속도로냐’ 하던 것이 어불성설이었듯이 ‘복지냐, 4대강이냐’ 하는 것도 선택의 문제가 아님을 국민이 꿰뚫어볼 때가 됐다.

40여 년 전에도 지역 불균형론이 경부고속도로 추진의 발목을 잡았다. 이 주장의 선두에 섰던 김대중 당시 신민당 의원은 “서울∼강릉 영동고속도로를 먼저 놓자”고 대안을 제시했지만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재를 뿌리기 위한 제안에 불과했다. 실제로 영동고속도로가 경부고속도로보다 국가적 효용이 클 것으로 봤다면 안목 없음을 증명할 뿐이다. 지역발전을 둘러싸고 요즘 벌어지고 있는 ‘제로섬식 싸움’도 국민 전체의 ‘파이 키우기’를 해치는 요인이 된다.

우리나라에서 대학교수들은 아는 게 가장 많은 지식인으로 분류된다. 경부고속도로에 대해서도 상당수 교수들이 ‘반대의 권위’를 높여주었다. 하지만 경부고속도로뿐 아니라 지난날 교수들이 반대한 많은 국책사업들이 결국은 오늘의 번영을 이끌었다. 더구나 작금엔 전공 분야를 가리지 않고 거의 파당화(派黨化)한 교수들이 떼 지어 국가정책에 반대하는 사례가 많다 보니, 진짜로 뭘 알고 그러는지 의문이 생길 지경이다.

변화 거부가 곧 守舊다

박 대통령은 하루 두 끼 먹던 국민이 세 끼 먹을 수 있도록 세계 최빈국을 부강한 나라로 바꾸려 했다. 이를 위해 숱한 불가능에 도전했다. 그야말로 진보(進步)다. 반면 박 대통령이 주도한 산업화 과정의 핵심 프로젝트에 사사건건 반대한 세력은 현상 유지에 안주하려 했다는 점에서 수구(守舊)세력이었다. 그 세력에 줄서온 사람들이 지금 진보라고 자칭하면서 이명박식 개혁과 변화를 방해하고 있다. 도대체 누가 진보이고, 누가 수구인가.

배인준 논설주간 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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