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아름다운 은퇴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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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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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약한 정신력 다잡으면 한국 마라톤 도약 가능성”

체전은 20년전 첫 완주 생각하며 고향 위해 뛰어
좋은 지도자 돼 국민께 받은 사랑 되돌려 드릴것

《반쯤 감긴 것처럼 보이는 작은 눈에 아래턱을 잔디밭처럼 메운 수염. 국민들은 이봉주(39) 하면 순박한 시골 청년 같은 모습을 떠올린다. 그리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운동선수로 기억한다. 그에게 ‘국민 마라토너’라는 칭호가 붙은 데는 성실함과 꾸준함이 큰 몫을 했다. 20년간 풀코스 41회 완주,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은메달, 1998년 방콕과 2002년 부산 아시아경기 2연패, 2001년 보스턴 마라톤 우승. 노력만으로 이루었다고 보기엔 무척 화려한 기록들이다.》

3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를 방문한 이봉주는 트레이드마크였던 검은 턱수염을 밀고 반바지 유니폼이 아닌 말쑥한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차분히 준비해 지도자의 길을 가겠다”고 말했다. 김재명 기자
3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를 방문한 이봉주는 트레이드마크였던 검은 턱수염을 밀고 반바지 유니폼이 아닌 말쑥한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차분히 준비해 지도자의 길을 가겠다”고 말했다. 김재명 기자
우리는 그의 성과를 성실함과 꾸준함의 산물로만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봉주야말로 천부적 재능을 타고난 천재 마라토너였는지 모른다. 어느새 불혹에 다다른 ‘순수 청년’ 이봉주는 물론 “내가 딴 메달, 여러 기록, 뛰고 싶다는 정신까지 전부 후천적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그를 노력파 선수로만 보는 시선에 대해서도 “결코 억울하지 않다”며 어린애같이 웃는다.

이봉주는 1970년 태어나 1990년 처음 마라톤 풀코스를 뛰었다. 그리고 2009년 10월 전국체전을 끝으로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정확히 인생의 절반을 마라토너로 산 것이다. 3일 만난 그는 여전히 상기된 표정이었다. 평생 입을 것만 같던 선수 유니폼을 벗은 그는 “만감이 교차한다”고 말했다.

―마지막 레이스를 마친 지 열흘이 지났다.

“섭섭한 마음이 크다. 미련도 남는다. 많은 분이 성원해 주셨는데 모두 뒤로 하고 가려니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3월 서울국제마라톤 겸 동아마라톤대회를 끝으로 은퇴한다고 했는데 이번 전국체전에서 충남대표로 다시 뛴 이유는 무엇인가. 내년에 또 뛸 가능성은 없나.

“무엇보다 뛰고 싶은 욕망이 강했다. 고향을 위해서 뛰어본 적이 별로 없다 보니 뭔가 하고 싶었다. 전국체전은 나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다. 1990년 전국체전에서 처음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하며 준우승을 차지했다. 그때부터 조금씩 주목받은 것 같다. 한 대회로 마라톤 인생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게 돼 기쁘게 생각한다. 다시 선수로 뛰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계속 뛰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은퇴를 결심한 이상 물러나야 한다.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때가 가장 물러나기 좋은 때라고 생각한다.”

―1990년과 2009년 뛸 때를 비교하면 어떤가.

“20년 전에 뛸 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저 젊은 패기로 뛰었다. 하지만 선수생활을 마감한다고 생각하며 뛰니 많은 생각이 났다. 그동안 출전했던 대회들, 고된 훈련들도 생각나고…. 1990년이랑 비교해 체력은 확실히 떨어진 것 같다. 특히 몸이 회복되는 속도가 많이 느려졌다.”

―전국체전 우승 후 인터뷰에서 마라톤을 하면서 울어본 기억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정작 그 인터뷰를 할 때는 눈물을 보였다. 그렇다면 그때 처음으로 운 것인가.

“그렇다. 내 기억으로는 선수로 뛰면서 운 적이 없다. 하지만 그날은 눈물이 나더라. 지나간 시간도 많이 생각나고 이제 끝이라는 마음에 나도 모르게 그만…. 그때가 선수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 눈물인 것 같다. 원래 눈물이 없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선수생활을 하면서는 쉽게 울어선 안 된다고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내다 보니 눈물이 없어지지 않았을까.”

―1일 열린 중앙서울마라톤에서 해설자로 데뷔한 소감은…. 앞으로 계속할 계획인가.

“생각보다 어려웠다. 마라톤이든 해설이든 역시 경험이 중요한 것 같다. 해설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야 되는데 흥분을 가라앉히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후배들이 외국 선수에게 뒤처지는 걸 보면서 당장 나가서 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2개나 딴 심권호가 왜 TV 해설만 하면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지 이해할 것 같다. 어쨌든 좋은 경험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해보고 싶다. 그때는 제대로 준비해서 수준 높은 해설을 하고 싶다.

―안타깝게도 이봉주를 넘어서는 한국의 젊은 마라토너가 보이지 않는다.

“요즘 젊은 선수들은 정신력이 너무 약한 것 같다. 본인들은 열심히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많이 부족하다. 예전에는 다들 확실한 목표의식을 갖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게 없다. 못해도 그만이라는 식으로 마지못해 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하지만 한국에는 분명 가능성 있는 후배가 많다. 정신력만 다잡는다면 세계 정상권에 다시 오를 수 있다.”

이봉주는 아직까지 은퇴 후 계획을 구체적으로 밝힌 적이 없다. 많은 이가 가장 궁금해 하는 부분이지만 그는 줄곧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있다. 당분간은 좀 쉬고 싶다”며 말을 아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한국 마라톤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하다.

그는 “결국 지도자의 길을 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국민들께 받은 사랑을 돌려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한국 마라톤 발전에 헌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명성을 등에 업을 생각은 없다. 제대로 이론 공부를 한 뒤에 후배들을 지도하고 싶단다. 이를 위해 그는 서두르지 않고 차분히 준비하고 있다.

그는 스포츠심리학이나 생리학 공부를 위해 일본이나 미국으로 유학을 갈 계획이다. 지식으로 무장한 뒤 선수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지도자가 되는 게 그가 꿈꾸는 미래의 모습이다. 최종 목표는 바로 이봉주를 능가하는 제2의 국민 마라토너를 키워내는 것.

한편 이봉주가 은퇴하자 그를 국민적 영웅으로 대우하기 위한 움직임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손기정기념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김성태 국회의원은 이봉주에게 최고 등급 체육훈장인 청룡장을 주기 위해 국회 차원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현 규정으로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아닌 이봉주는 청룡장을 받을 수 없다. 하지만 김 의원은 동료 의원 100명 이상의 서명을 받을 계획이다.

한우신 기자 hanwshin@donga.com

이봉주

―1970년 10월 10일 충남 천안 출생

―천안 성거초등학교-천성중-광천고-서울시립대

―1990년 10월 19일 전국체전에서 첫 풀코스 완주. 2위(2시간19분15초)

―1995년 3월 19일 동아국제마라톤 우승(2시간10분58초)

―1996년 8월 4일 애틀랜타 올림픽 은메달(2시간12분39초)

―1998년 12월 20일 방콕 아시아경기 금메달(2시간12분32초)

―2000년 2월 13일 도쿄 국제마라톤 한국기록 작성(2시간7분20초·현 한국기록)

―2002년 10월 14일 부산 아시아경기 금메달(2시간14분4초)

―2007년 3월 18일 서울국제마라톤 우승(2시간8분4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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