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길]<92>‘愛人敬天’ 도전 40년

  • 입력 2009년 9월 23일 03시 00분


코멘트
〈15〉불고기 파티로 끝난 노사분규
1980년 애경유화서 노사분규
공장 달려가 회사상황 직접 설명
노사화합 정착 계기 만들어

우리 비록 작게 출발했지만

크고 따뜻한 삶의 터로

가꾸고저 새천년 창립 十五주년을 맞아

하나된 마음을 심는다.

애경공업(현 AK켐택) 포항공장에 세운 노사화합 기념석 글귀이다. 뉴 밀레니엄을 기념해 2000년 공장 정문에 세웠다. 포항공장 임직원이 급여의 5%씩을 갹출해 모은 돈으로 만들었다. 회사의 식구인 직원을 대할 때는 모든 마음을 기울이려고 노력했다. 회사와 노조는 고용인과 사용인이라는 상반된 자리에 있지만 진심을 보여주면 노사분규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하지만 그런 기대가 빗나간 적이 있었다. 1980년은 노사분규가 유독 많았다. 강원도 사북에서 일어난 사북노동항쟁에 영향을 받은 전국의 노조와 노동자가 임금 인상, 체불임금 지급, 복지제도 개선 등 다양한 이유로 회사와 대립각을 세웠다. 1980년 1월부터 4월까지 발생한 노사분규는 627건으로 1979년 한 해 동안 발생한 105건보다 6배나 많았다. 전국의 수많은 기업에서 노사분규가 일어났고, 그 여파인지는 모르겠으나 삼경화성(현 애경유화)에서도 강도가 큰 노사분규가 발생했다.

노조 중에서 철강 또는 석유화학 업종 노조는 역사가 깊고 투쟁 강도가 높기로 유명했다. 그런데다 애경그룹 계열사에서 처음으로 노사분규가 발생했다고 하니 당황스러웠다. 회사와 협상이 결렬되자 노조는 ‘사장 나오라’며 극단으로 치달았다. 임원이 나서도 물러서지 않고 노조원은 사장과 대화를 해야겠다며 사장이 직접 협상 테이블에 앉기를 요구했다. 주위 사람들은 노조가 흥분했으니 위험하다고 말렸지만 나는 피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울산으로 내려갔다.

내려가 보니 입구에는 바리케이드를 쌓아놓은 채 시뻘건 글씨로 여러 구호를 붙이고 회사 버스 유리창은 모두 깨진 상태였다. 솔직히 무섭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바리케이드를 넘어 들어가 사무실에서 노조대표들과 마주 앉았다. “더 잘살기 위해 노조가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두들겨 부순다고 무슨 해결이 되나요. 건설적이지 않은 일은 하지 말고 발전적으로 해결합시다.” 내 설명과 설득에 노조 대표들은 수긍했지만 사무실 밖 마당에 있는 노조원들이 반대할 것이라며 요구가 전부 관철되길 주장하면서 물러서지 않았다.

나는 노조대표뿐만 아니라 노조원 전부를 이해시켜야 하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마당에 정좌하고 앉은 노조원들은 벌써 며칠째 단식을 하며 강경한 태도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자니 노조원이기 이전에 우리 회사 직원이라는 생각이 들어 우선 밥부터 먹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긴장된 상황에서 제대로 끼니를 잇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한 명씩 일으켜 세워 식당으로 데려갔다. 굶은 상태면 아무래도 심기가 불편할 테니 밥을 먹고 얘기를 하자고 달랬다. “여러분 요구대로 다 들어주면 회사는 당장 망합니다. 회사가 망하고 나면 노조가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여러분이 스스로 선택한 직장이니 조금씩 해결해 나갑시다.”

나는 노조원에게 당시 회사의 상태를 사실대로 설명해줬다. 진심이 통했는지 밤 11시가 되자 노조원이 밥을 먹기 시작했다. 울산까지 내려오기도 쉽지 않은 데다 직원이 모두 화합하는 분위기라 잔치를 벌이자는 데 생각이 닿았다. 문을 닫은 공장 주변의 식당에 급히 부탁해 불고기 파티를 열어 직원과 먹고 마셨다.

그렇게 해서 위기를 넘기고 내 진심을 알아준 그들에게 나는 다음 날 일일이 공장 곳곳을 찾아다니며 도와줘서 고맙다고 악수를 청하며 인사했다.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다시 잘해봅시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노조원에게 불려나간 아찔한 상황이었다. 나는 노조원에게 했던 약속을 충실히 지키도록 최선을 다했다. 회사 사정을 알려주니 직원 스스로 회사 상태를 잘 알게 됐고, 그 뒤로 애경에서 노사분규를 찾기 힘들게 됐다. 이후에도 몇 번의 노사분규 위기가 있었으나 별 탈 없이 위기를 넘겼다. 내가 직원을 믿고 마음을 나누게 된 것은 노사분규 직전에 터진 창사 이래 최대 위기에서 애경 가족이 나에게 먼저 보여준 애사심 때문이었다.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