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100년-사랑의 詩]김소월/‘먼 후일’

  • 입력 2008년 1월 4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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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후일

김소월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 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 때에 “잊었노라”》

세상의 모든 사랑은 영원성을 욕망한다. 어떤 가혹한 시간 속에서도 지금의 사랑을 지켜낼 수만 있다면. 하지만 시간은 언제나 내 사랑의 편이 아니다. 당신을 만나지 못하면서 어떻게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을 보존할 수 있을까? 그래서 사랑의 시는, 사랑의 불안한 미래를 견뎌내는 자기만의 내밀한 논리를 찾아 나선다.

당신이 지금 곁에 없다면, 무척 그리워하다가 결국 사랑의 미래를 믿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당신이 그런 나를 나무라면 어떻게 변명할까? 이 시는 간절한 반어법으로 이 비극적 상황을 넘어선다. 미래에 먼저 가서 현재의 내 사랑을 잊게 되는 장면을 설정한다. 지금 당신의 부재 때문에 미래가 두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사랑을 잃지 않게 해 달라는 간절한 신호를 보낸다.

‘먼 훗날’ 당신을 잊을지도 모른다는 직설법보다 더욱 간절한 것은, ‘오늘도 어제도’ 나는 당신을 잊을 수 없다는 현재의 뜨거운 진실이다. 그것은 내일에 대한 두려움과 당신에 대한 원망을 넘어서, 지금 내 사랑의 절박함에 대한 비명이 된다. 그래서 ‘먼 후일’은 끝내 만나고 싶지 않은 어떤 시간의 이름이다. 저 무서운 시간 속에서도 나는 당신을 잃고 싶지 않다. 사랑에 대한 가정법은 소멸에 대한 두려움을 뛰어넘어, 드디어 사랑의 영원한 현재성에 가 닿는다.

김소월은 한국 현대시 사상 가장 위대한 사랑의 시인이다. 그의 사랑의 시가 뛰어난 것은 사랑에 처한 개인의 복합적인 정서를 깊은 진정성으로 노래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랑을 둘러싼 섬세한 욕망에 대한 현대적 표현이었다. 내향적인 심성의 김소월의 생애는 생활고와 식민지의 억압적인 공기 속에서 불우했다. 생애의 마지막 시간들을 그는 정신적 경제적 폐인으로 살았다. 죽음의 순간 아내의 입에도 아편을 넣어 주었다고 알려진 생의 마지막 장면은 강렬한 비극으로 전해지지만, 사랑의 시들은 그 개인적 비극조차 생에 대한 사랑의 반어법으로 읽게 한다.

이광호 서울예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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