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칼럼]열린우리당, DJ가 답이 아니다

  • 입력 2006년 9월 22일 19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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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 전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한 외교잡지 인터뷰를 통해 최근의 한반도 정세에 대한 생각을 털어놓았다. 그는 미국의 네오콘(강경 신보수주의자)을 모든 위기와 갈등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북한 핵이나 미사일도 미국 앞에선 어린애 장난감밖에 안 될 텐데 네오콘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군비 확장의 구실로 악용(惡用)하고 있다”는 것이다. 남북관계나 한미관계가 안 풀리고 있는 것도 결국 이 때문이라는 뜻이다.

열린우리당 사람들이 반색을 했다. 이 어렵고 민감한 시기에 DJ가 자신들을 두둔하고 나섰으니 반가울 만도 했다. 김한길 원내대표는 19일 DJ를 예방하고 나서 “시력이 나쁜 사람이 안경을 쓰면 세상이 뚜렷이 보이는 것과 같은 그런 느낌이 든다”고 찬사를 늘어놓았다. 우리 야당사(史)에 30년이 넘도록 지속돼 온 ‘DJ에게 답을 묻기’가 어김없이 재현된 것이다. 과거 야당에 몸담았던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풍경 중의 하나다.

그만큼 DJ는 이 분야의 선구자이자 전문가로 인정받아 왔다. 이는 40년 정치역정 속에서 줄기차게 남북문제와 씨름해 온 DJ 자신의 신념과 노력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은 1971년 3월 24일 당시 신민당 대선 후보로서 그가 내놓았던 ‘4대국 보장론’의 충격을 기억하고 있다. ‘선구자’로서 DJ의 위상은 남북문제가 정치적으로 흥행이 될 것임을 일찍이 간파한 그의 현실감각 덕이었음도 부인하기 어렵다. ‘신념’과 ‘흥행’ 중 어느 쪽이 먼저였을까. 나는 후자가 전자를 끌고 왔다고 믿는 편이다.

그의 시대, 그의 철학은 여기까지다. 세상이 바뀌고 또 바뀌었다. 냉전이 끝나면 곧 평화가 올 줄 알았다. 햇볕정책만 쓰면 곧 통일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한반도와 그 주변은 더 차갑고, 더 복잡하고, 더 날카로운 대결의 시대로 빨려들어 가고 있다. 이 대변전(大變轉)의 시대에 DJ의 인식과 방법론이 여전히 유효할까. 아니라고 본다.

예를 들어 보자. ‘북한 핵과 미사일도 미국 앞에선 어린애 장난감’이라는 논리로는 이란의 핵 개발을 저지하려는 미국의 노력도 설명할 길이 없어진다. 이란의 핵도 미국엔 ‘어린애 장난감’에 불과할 것이고, 설령 이란이 핵미사일을 쏜다고 해도 미 본토까지 날아갈 턱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왜 미국이 기를 쓰고 막으려고 하는가.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를 지키고 지역(중동)에서의 핵 개발 도미노를 차단하기 위해서다. 북핵도 마찬가지다. 어떤 핵도 그것이 핵인 이상 국제성을 지닐 수밖에 없는 것이다.

DJ는 또 “한국 방위가 미국에 이익이 되기 때문에 미국이 한국에서 안 나갈 것”이라고 했다. 미국이 한국에서 완전 철수하면 중국의 힘이 한반도를 넘어 일본에까지 미치게 될 텐데 미국이 이를 용인하겠느냐는 것이다. 무책임한 예단이다. 1949년 미군이 철수함으로써 6·25전쟁이 났을 때나, 닉슨의 ‘괌 독트린’에 따라 1971년 주한미군이 일부 철수했을 때도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안 돼서 나갔겠는가.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후 전략적 유연성을 위한 주한미군의 추가 감축이 거론되는 판에 진부하기 짝이 없는 ‘미국 국익론’을 들고 나오는 것은 DJ 역시 낡은 틀 속에 머물고 있음을 보여 준다. 요즘은 한국이 점차 미국에 ‘계륵(鷄肋)’이 돼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질 때가 많다. 내가 갖자니 썩 내키지 않고, 남을 주자니 아까운 ‘닭갈비’와 같은 존재 말이다.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DJ는 “한반도 문제에 우리가 주도권을 못 갖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불행”이라는 말로 결론을 대신했지만 그 ‘주도권’이란 것은 또 얼마나 허망한 관념의 산물인가. 지금까지 여러 차례 남북 장관급회담을 했지만 북의 반대로 핵 문제 한번 시원하게 논의해보지 못했다. 이런 북을 상대로 핵 문제의 ‘주도적 해결’을 도모할 수 있겠는가. 어려운 얘기다. 이게 현실이다

DJ를 부정하고 갈 수야 없겠지만 이제는 뛰어넘어야 한다. 유능하고, 비전 있는 많은 정치엘리트가 쏟아져 나오는데도 언제까지 DJ의 패러다임에 기대려고 하는가. 통일논의의 진전을 위해서라도 DJ의 주술(呪術)에서 벗어나야 한다. DJ를 상대로 ‘창조적 배신’을 감행할 인물이 여당에는 없는가.

이재호 수석논설위원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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