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눈/프랭크 리치]‘이슬람=파시즘’ 위험한 슬로건

  • 입력 2006년 9월 5일 03시 05분


코멘트
최근 도널드 럼즈펠드 미국 국방장관은 미 재향군인회(AL) 연설에서 이라크전쟁 반대론자들을 빗대 “1930년대 나치의 등장을 조롱하고 무시하며, 히틀러와 친해질 수 있다고 믿었던 이들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이런 미국인들은 “도덕적·지적 혼란을 겪고 있을 뿐만 아니라 테러리스트들이 추구하는 ‘새로운 타입의 파시즘’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의 발언은 올해 11월 중간선거 때까지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의욕적으로 펼쳐 나갈 선전 캠페인의 진수를 보여 줬다. 장기화되고 있는 이라크전의 역사를 다시 쓰기 위해 무엇이든 서슴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출인 셈이다.

1938년 대독(對獨) 유화정책을 펼친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가 히틀러와 악수하고 있는 사진을 볼 때면 1983년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는 럼즈펠드의 모습이 떠오른다. 당시 럼즈펠드는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라크를 지지하기 위해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의 개인 밀사 자격으로 바그다드를 방문했다.

당시 후세인 대통령은 고문과 학대를 일삼는 독재자였지만 럼즈펠드는 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도덕적 혼란을 겪고 있는 사람은 바로 럼즈펠드 장관이 아닌가.

그는 지적(知的) 혼란도 겪고 있다. 테러조직 알 카에다의 활동을 부추기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힘을 실어 준 것은 럼즈펠드 장관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는 2001년 9월 10일 국방부 직원들에게 보낸 정책 고시에서 “옛 소련보다 더 상대하기 힘든 적이 미국의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적은 ‘펜타곤 관료주의’였다.

3개월 후 미군이 파키스탄 접경 지역에서 오사마 빈 라덴 체포를 위해 병력 보강을 긴급 요청했을 때도 그는 꿈쩍하지 않았다. 이라크 재건 과정에서도 병력 증강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서 이라크는 결국 테러리스트들의 피난처가 됐다.

얼마 전까지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전을 베트남전과 비교하는 이들에 맞서 이라크전을 미국 독립전쟁과 연결시키는 전략을 구사해 왔다. 그러나 요즘 백악관은 ‘이슬람=파시즘’이라는 새로운 슬로건을 내걸고 있다.

이 구호는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부시 행정부가 아직 적이 누구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보여 준다. 정치분석가 캐사 폴릿 씨는 최근 네이션지에 기고한 글에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이슬람 파시스트는 누구를 말하는가-현 정권인가, 아니면 반대파인 광신교도들인가”라고 물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전을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국과 추축국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오갔던 ‘오마하 비치’ ‘과달카날 섬’과 비교했다. 그는 바그다드의 차량 폭탄 테러범을 9·11테러 당시 세계무역센터에 비행기를 충돌시킨 테러리스트와 비교하며 “모두 21세기 이념 투쟁의 증거”라고 말했다.

존 머사 하원의원은 “이라크는 외국 테러리스트들의 천국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이라크에는 서로 싸우는 이라크인들만 있을 뿐이며, 미국은 이 싸움의 중간에 끼여 있다는 것이다.

미국인들이 9·11테러 희생자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빈 라덴, 그리고 다른 무국적 테러리스트, 파시스트들과 벌이는 전쟁을 이라크전과 동일시하려는 부시 행정부의 의도에 말려들지 않는 것이다. 이라크전 개전 이후 죽은 미국인(2600여 명)은 5년 전 화요일 아침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으로 죽은 미국인의 수에 육박하고 있다.

프랭크 리치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