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향기속으로 20선]<5>궁궐의 우리나무

  • 입력 2006년 3월 24일 0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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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나무는 먹을 것을 찾아 산야를 헤매던 굶주린 백성들이 신기루처럼 나타나는 ‘헛것’을 보고 붙인 이름일 것이다. 가느다란 줄기의 뻗침이 국수 면발을 연상하게 하고 색깔도 영락없이 국수를 닮아 있다. 삶의 질은 고사하고 먹은 날보다 굶은 날이 더 많았던 우리 선조들이 국수나무 옆에서 진짜 국수 한 그릇을 그리며 허리를 졸라맸을 생각을 하면 오늘의 풍요가 죄스럽기까지 하다. ―본문 중에서》

‘궁궐의 우리나무’는 보고 또 보는 책이다. 서울의 4대 궁궐에 자라는 우리 나무를 직접 찾아볼 수 있게 지도와 함께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계절을 바꿔 가며 나무를 보러 고궁을 찾는 일은 이 책이 내게 준 선물이기도 하다.

이 책은 오래도록 현미경을 가지고 나무의 재질을 들여다보는데 평생을 바쳐 온 학자의 책이며, 나무에 관한 에세이다. 저자는 사람들과 나무를 직접 연결시킬 수 있는 장소를 찾다가 고궁에 눈이 머물렀고, 일반인의 눈높이에서 관람로를 따라 나무 지도를 그려 가며 우리를 친절하게 나무의 친구로 안내한다.

필자는 창경궁과 경복궁, 종묘를 자주 찾는다. 그런데 고궁을 돌다 보면 눈에 들어오는 나무는 있되 그 이름이 무언지 몰라 궁금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단풍나무, 은행나무, 소나무, 벚나무, 느티나무, 버드나무 말고 쥐똥나무와 서어나무와 자작나무와 음나무까지 알고 싶은 마음. 예를 들면 김철수와 이영희와 박길동 말고, 오정희와 황동규와 허수경을 알아보는 일. 그러니 책방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더 정확히 말해서 각 장의 맨 앞에 붙어 있는 궁궐의 나무 지도를 발견하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단풍이 곱던 그해 가을이 생각난다. 창경궁에 이 책을 들고 가서 직접 나무를 찾았고, 색색의 낙엽을 책갈피에 끼워 놓았다. 그 나뭇잎들은 아직도 책에 끼여 있다. 입구의 살구나무는 여전히 푸른 잎을 달고 있었고 자두나무는 잎이 붉게 물든 채 잎을 많이 떨어뜨리고 있었다. 푸른 여름일 때는 제대로 구분 못할 나무들이 가을을 맞는 속도에서 차이가 났다. 언젠가 낙엽이 좋아서 충동적으로 택시를 타고 가서 창경궁 초입의 멋진 나무 아래서 커피를 마시다 왔는데, 그 나무그늘이 바로 층층나무와 느티나무 사이였다. 함박나무 잎은 어찌나 크던지 잎자루를 한참 잘라내고도 책 한 면에 가득했다. 그냥 지나쳤을 고추나무, 산딸나무, 회화나무도 덕분에 알아볼 수 있었다. 궁금했던 음나무를 찾고서 반가웠던 일, 뽕나무는 찾다 찾다 못 찾았던 일, 화장실 앞에서 서어나무의 근육질을 발견하곤 쓰다듬어 주었던 일, 산수유 열매를 몇 개 따서 주머니에 넣었던 일. 그때 부지런히 나뭇잎을 주워 책에 끼웠던 꼬마는 나무처럼 훌쩍 자라 이제 여학생이 되었다.

나무 맹(盲)이었던 내게 이 책은 나무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을 뜨게 해주었다. 그리고 나는 이 책에서 시작해 우리 집 근처, 우리 학교 근처의 나무들도 친구로 삼았다. 인식의 깊이가 사랑의 깊이라고 한다. 이름을 알고 나니 신기하게도 나무들이 새롭게 보이고 꽃들도 더 향기롭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제 봄이다. 이름을 불러주면 우리에게 와서 꽃이 될 나무들이 우릴 기다리고 있다. 친절한 책을 들고 나무 아래 서 보자. 나무의 은혜를 입으며 걷는 기쁨, 읽는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봄이다.

서미선 중화고등학교 국어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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