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민 칼럼]우리시대 얻은 것과 잃은 것

  • 입력 2006년 1월 10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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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전후(戰後) 잿더미에서 오늘날과 같이 재기할 수 있던 것은 도쿄(東京)대와 이와나미(巖波) 문고, 그리고 일본의 어머니들 덕분이라는 말이 있다. 도쿄대 출신의 엘리트 관료들이 경제 발전을 이끌었고, 이와나미 문고와 같은 좋은 출판사들이 일본 사회의 지적 수준을 높이는 데 기여했으며, ‘남에게 폐 끼치지 말라’, ‘정직하게 살라’고 자식들을 가르친 일본 어머니들의 훌륭한 가정교육이 이 나라를 떠받치는 정신적 기둥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가치관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말이다.

학교교육 사회교육 가정교육을 국가 발전의 주 원인으로 여기는 그들의 사고방식은 우리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서울대를 없애야 한다는 소리가 나오고, 정음사(正音社) 같은 유서 깊은 출판사가 사라지고, 한국의 어머니 하면 (희생적 역할에도 불구하고) 치맛바람부터 연상되는 안타까운 우리의 현실에 깨우침을 주는 가치관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전 총리는 ‘메이지 백년사’에서 “전후 혹독한 상황에서도 일본인들의 예절과 친절 같은 근본은 변치 않고 남아 있었다. 그리고 ‘문화국가 건설’을 그들의 사는 보람으로 생각하고 미래를 믿었다”고 회고했다. 그들이 경제만을 최고의 가치, 유일한 목표로 삼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 눈부신 경제 발전과 함께 모범적인 사회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 국민이 경제 개발에 진력하던 1970년대, 가장 흔히 듣던 말은 ‘잘살아 보세’였다. 그때 ‘잘산다’는 것은 바르게 살거나 착하게 사는 것과는 다른 의미였다. 가난에 한 맺힌 우리에게 잘사는 것은 부유하게 사는 것과 동의어였으며 그 과정에 도덕이나 정신 등의 비실용적 가치는 끼어들 틈조차 없었다. 충효사상, 국민교육헌장 같은 정신운동도 독재 유지를 위한 상투적인 구호에 불과했다. 경제 발전의 시작과 함께 사회의 퇴락은 이미 잉태됐던 것이다.

그 후 등장한 운동권 인사들에게서도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와 이익을 신장해 주려는 정의감은 볼 수 있었지만 휴머니즘은 빠져 있었다.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좌경 이념과 근로자들의 권익이었고 그것을 얻기 위한 수단은 ‘투쟁’이었다. 삭발과 몸싸움은 산업체의 일상적 모습이었고 민법 형법보다 강력한 ‘떼법’이 관습법으로 자리 잡는 가운데 권위와 상식은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운동권 투사들 덕택에 근로자들의 주머니는 불룩해졌을지 몰라도 투쟁과 쟁취의 구호 속에 시민들의 성품은 사나워지고 국민 정서는 황폐해졌다. 얻은 것은 돈이었고 잃은 것은 정신이었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국부를 키우는 부작용으로 도덕성을 손상시켰다면 운동권 인사들은 키워 놓은 부를 나누려는 과정에서 (물론 그들만의 책임은 아닐지라도) 순박했던 국민의 심성을 오염시켜 놓았다. 많은 돈이 여러 기업으로부터 근로자들의 지갑을 거쳐 빠르게 유흥업소로 흘러들어 갔고 그 당연한 결과로 1980년대 말 우리 사회에서는 퇴폐 이발소와 음란 목욕탕, 그리고 주점들이 최고의 성장산업이었다. 공급이 수요를 못 따라가니 인신매매범이 극성을 부릴 지경이었다. 그 당시 한몫 챙긴 인신매매업자들, 퇴폐 주점의 주인들, 그리고 오늘날까지 그런 일을 생업으로 삼고 있는 많은 사람은 그들의 ‘행운’에 대해 단골손님들보다 오히려 운동권 투사들에게 더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경제는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건전한 사회, 아름다운 가정을 위한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20, 30년 전보다 우리 경제는 엄청나게 발전했고 가전제품이나 자동차의 품질은 비교할 수 없이 좋아졌지만 우리의 생활이 그때보다 더 행복하고 인간의 품질도 더 좋아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보수와 진보, 지역 간 계층 간에 질시와 의혹과 반목이 사람들 마음속에 가득하고 포르노와 욕지거리가 인터넷을 뒤덮는 세상이라면 경제가 좋아진들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오늘날 국정을 맡은 정치권이 과거 우리 사회의 정신을 황폐하게 하는 데 일조를 한 책임을 느낀다면 이제는 국민정신 회복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새해 벽두, 문득 지나간 세월을 돌이켜 보면서 경제 못지않게 중요한, 잃어버린 우리의 전통적 덕목에 새삼 그리움을 느낀다.

이규민 기자 경제 大記者 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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