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人3色]시인의 상상력, 詩 안에만 가두지 말라

  • 입력 2005년 4월 22일 17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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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국의 록 그룹 ‘레드 제플린’이라면 거의 모든 노래를 기억할 수 있을 정도로 좋아했다. 이들의 데뷔 앨범 재킷을 보면 비행선이 폭발하면서 추락하는 장면이 담겨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제플린 백작이 만든 비행선의 폭격으로 꽤나 고생한 영국에서 나온 그룹이니까, 그 골칫덩어리 비행선이 폭파되는 사진을 넣은 심리의 이면에는 영국인으로서 ‘샘통’이라는 감정도 숨어 있는 듯하다.

이 제플린호를 다시 보게 된 것은, 1929년 일본 서양화의 새로운 경향을 보여 주던 전람회인 ‘이과회’에 입선된 고가 하루에의 유화 작품 ‘바다’에서다. 이 그림을 보면 하늘에는 제플린호가 유유히 날아다니고 있고, 바다 속에는 내부가 보이는 잠수함이 들어 있다. 미래파적인 향취가 물씬 풍기는 전위 작품이다. 이 그림에 왜 제플린호가 등장하냐면, 그해 8월 19일 미국에서 출발한 제플린호가 일본을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고가 하루에를 비롯한 일본인들에게 이 제플린호는 근대의 표상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이 제플린호를 예술 작품에 가장 먼저 받아들인 사람은 아마도 시인 이상일 듯. 이상은 1932년 7월 ‘조선과 건축’지에 ‘건축무한육면각체’라는 제목 아래 여러 편의 시를 발표했다. 그중 첫 번째 시를 보면, ‘쾌청(快晴)의공중(空中)에붕유(鵬遊)하는Z백호(伯號).회충양약(蛔蟲良藥)이라고 씌어져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제플린호가 한국에 들렀다는 증거는 없으니, 아마도 이 ‘Z백호’란 그 시를 쓰던 미쓰코시백화점 경성지점 옥상 카페에서 올려다본 광고 풍선일 테다. 거기에 ‘회충양약’이라고 써 놓으면 금상첨화겠다. 회충약 광고 풍선을 보면서 제플린호를 상상했으니, 이상의 상상력이란 참으로 근대적이다.

그러다가 언젠가 이 시를 소재로 한 영화를 보다가 크게 웃고 말았다. 회충을 박멸하려는 속셈인지는 몰라도 그 영화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비밀리에 조직한 사람들로 ‘Z백호’가 등장하고 있으니까. ‘Z백호’란 1930년대 사람들에게는 ‘퍼스컴’과 같은 신기한 신조어에 불과했는데, 그게 그만 비밀집단 이름으로까지 쓰이게 된 것이다. 이상의 시를 그 시 안에서만 해석하려고 드니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연전에 나온 하쓰다 토오루의 책 ‘백화점’을 읽다가 우리가 아는 백화점의 모든 형식을 만들었다고 하는 다카하시 요시오에 관한 얘기에 큰 흥미를 느꼈다. 다카하시가 만든 백화점은 경성으로 고스란히 옮겨져 수많은 우리 문학작품에 등장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차에 이번에 야마구치 마사오의 책 ‘패자의 정신사’가 출간돼 다카하시 요시오를 비롯한 미쓰코시 개혁파들의 뒷얘기를 좀 더 읽을 수 있었다.

뒷얘기들은 단순히 뒷얘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상의 시를 해석하는 데에, 때로는 미쓰코시 경성지점의 영업방식이 최신의 서양 시(詩) 이론보다 더 도움이 될 때가 있다. 그들이 손님을 끌기 위해 옥상정원을 만들고 광고 풍선을 띄우지 않았다면, 이상의 시는 나오지 않았을 테니까. 이상을 난해시인의 자리에서 구출해내는 일은, 예컨대 박헌영을 단순히 공산주의자의 자리로부터 구출해내는 일과 비슷할 것이다.

요컨대 상상력이 학문 간의 벽을 넘어갈 필요가 있다. 시인이라고 밤낮 원고지만 본 게 아니라는 것은 ‘패자의 정신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시인이 증명한다. 이제는 그들을 모두 우리와 같은 인간의 자리로 되돌리는 일이 필요하다.

김연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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