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음악 기행]‘슈베르트의 낭만’…오스트리아 빈

  • 입력 2005년 2월 3일 15시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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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의 핵심을 이루는 슈테판 대성당 종탑에서 본 빈 시가지. 고딕식의 이 성당은 12세기 중반에서 15세기에 걸쳐 세워졌다. 사진 정태남씨
빈의 핵심을 이루는 슈테판 대성당 종탑에서 본 빈 시가지. 고딕식의 이 성당은 12세기 중반에서 15세기에 걸쳐 세워졌다. 사진 정태남씨
슈테판 대성당의 높은 종탑 위에 올라서서 오스트리아 빈의 북동쪽을 스쳐 흘러가는 도나우 강을 지켜본다. 서기 180년 초반 겨울이 끝날 무렵, 바로 이곳 도나우 강변의 야전 막사에서 로마제국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영원한 안식을 맞이했다.

스토아학파 철학자이기도 했던 그가 전장에서 틈틈이 쓴 ‘명상록’의 한 구절을 떠올려 본다.

‘우주의 모든 존재들을 생각해 보라. 그 속에서 너의 존재는 얼마나 작은가. 무한한 시간을 생각해 보라. 그중에서 너에게 할당된 시간은 얼마나 짧은 순간에 불과한가.’

○슈테판 대성당서 내려다본 우수에 잠긴 도시

로마제국의 병영 빈도보나(Vindobona)에서 도시로 발전된 빈(Wien)은 이탈리아식 표기 비엔나(Vienna)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빈은 그 이름에서도 느껴지듯 세련되고 귀족적인 기품을 지닌 여인과 같은 인상을 주는 도시이다. 동시에 뭐라고 꼭 집어서 표현할 수 없는 우수(憂愁)와 향수(鄕愁)가 흐른다.

지금으로부터 208년 전인 1797년 1월 31일. 슈베르트는 이러한 도시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던 것일까? 그의 작품중 피아노곡 ‘즉흥곡 Op.142 No.2’와 연가곡 ‘겨울나그네’에서는 빈의 그윽한 멜랑콜리가 느껴진다.

빈은 모차르트, 하이든,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말러 등 많은 대음악가들의 보금자리였다. 특히 슈베르트는 빈의 토박이였다.

슈베르트가 살던 19세기의 전반과 19세기 후반의 빈 시가지 모습은 많이 다르다. 고도(古都) 빈의 모습이 대대적으로 탈바꿈한 것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프란츠 요제프 1세(1830∼1916) 오스트리아 황제가 1848년부터 1916년까지 68년간 집정했던 기간이었다. 황제는 구시가지를 둘러싸고 있던 성곽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도심순환도로 링(Ring)을 건설했으며 링을 따라 오페라 극장, 의사당, 시청, 대학 등 공공건물을 세우고, 정원과 숲으로 단장했다. 다각형처럼 돌아가고 있는 링의 중심에는 12세기 중반에서 15세기에 걸쳐 세워진 고딕식의 슈테판 대성당이 거대한 해시계의 중심축처럼 하늘을 찌르듯 우뚝 서 있다.

링의 남동쪽에 있는 넓은 시립공원(Stadtpark) 숲 속을 거닐어 본다. 링이 완성되던 1860년대에 조성된 이 공원은 빈 최초의 시민공원으로, 도심 속에서 자연을 만끽할 수 있게 한다. 이 공원은 빈에서 흔히 보이는 면도칼로 자연을 베어 놓은 듯한 프랑스식의 정원도 아니고, 자연을 건축으로 보이게 하는 이탈리아식 정원도 아닌, 자연을 자연스럽게 보이게 하는 수수한 영국식 정원이다.

이곳에는 슈베르트를 비롯해 요한 슈트라우스, 레하르, 브루크너 등 빈에서 활동했던 음악가들의 기념상을 볼 수 있다. 그중에서 슈베르트 기념상은 제왕 같은 모습으로 인간적인 면모가 보이지 않는다. 독일 낭만가곡의 기틀을 세우고 그 예술적 가치를 무한하게 높인 ‘가곡의 왕’에게 바치는 경의의 표시일까?

시립공원 안에 있는 슈베르트 기념상. 제왕과 같은 모습만 있을 뿐 인간적인 면모는 보이지 않는다.

○‘겨울나그네’ 24개 가곡 세계인의 연가로

휘몰아치는 겨울바람에 떨고 있는 공원의 나뭇가지 소리는 음악가로서 빛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가난과 질병 속에서 마지막으로 쓴 연가곡 ‘겨울 나그네’를 연상하게 한다. 24개의 가곡으로 구성된 이 가곡집은 사랑의 상처를 받은 나그네가 눈보라치는 겨울에 정처 없이 방황하며 겪은 일을 노래하고 있는데, 그 이면에는 모든 것으로부터 소외된 한 인간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슈베르트는 그중 5번째 곡 ‘보리수’를 그토록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보리수 그늘 아래에서 단꿈을 꾸고 나뭇가지에 사랑의 말을 새겨두었던 나그네가 겨울에 먼 길을 떠나 방랑할 때, ‘여기 와서 안식을 찾으라’는 속삭임인 양 바람결에 흔들리던 보리수 나뭇가지 소리를 회고하는 내용이다. 이 간결하고 소박한 노래는 깊은 우수를 느끼게 한다. 또 마지막 곡 ‘거리의 악사’는 동네 개나 짖어대기나 하지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 늙은 악사의 고달픈 모습을 그리고 있다. 슈베르트는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삶을 거리의 악사에 비추어 보았던 것일까?

그는 ‘겨울나그네’를 완성하고 난 다음해인 1828년에 영원한 안식을 찾아 떠나고 말았다. 그의 나이 31세. 무한한 시간 중에서 그에게 할당된 시간은 너무나도 짧았지만 그가 남기고 간 음악은 거의 200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 깊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시립공원 밖을 나와 도나우 운하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성 슈테판 대성당 광장 쪽에서 거리의 악사들이 연주하는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이 흥겹게 울려 퍼진다. 오스트리아의 비공식 국가(國歌)이며 전 세계로 방영되는 빈의 신년 음악회를 장식하는 이 곡은 빈을 낭만적인 도시로 만든다. 하지만 이 흥겨운 선율은 빈에 흐르는 멜랑콜리를 달콤함 속에 감추는 것만 같다. 나만이 그렇게 느끼는 것일까?

정태남 재이탈리아 건축가 www.tainam-jung.com

▼‘겨울나그네’의 보리수, 성문앞 우물곁에 있었을까?▼

슈베르트가 '보리수'를 작곡했다고 하는 휠더리히스뮐레 레스토랑.

가곡집 ‘겨울나그네(Winterreise·정확히는 ‘겨울 여행’)는 슈베르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독일 서정시인 빌헬름 뮐러가 1821년에서 1822년에 걸쳐 완성한 시집에 곡을 붙인 것. 그중 ‘보리수’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빈 교외의 뫼들링 외곽 횔더리히스뮐레 레스토랑에는 슈베르트가 ‘보리수’를 이곳에서 작곡했다고 해서 입구 벽면에 슈베르트의 초상과 ‘보리수’ 악보가 그려져 있고 슈베르트 기념판이 있다. 뫼들링 지역이 프란츠 주페의 징슈필(노래극) ‘프란츠 슈베르트’의 배경이 되기 때문에 횔더리히스뮐레가 바로 ‘노래의 고향’이 된 것이다.

그런데 ‘보리수’는 실제로 어디에 있었을까? 한때 슈베르트 연구가들은 시인 뮐러가 태어난 곳에서 멀지 않은 독일 헤센 주의 바트 조덴알렌도르프라고 주장했다. 그곳에는 정말로 성문과 그 앞에 큰 보리수가 있었는데 1912년 폭풍우에 쓰러졌다고 한다. 그렇지만 성문은 뮐러가 ‘겨울 나그네’를 완성한지 5년이 지난 1827년에 세워졌다고 하니 ‘성문 앞 우물 곁에 서 있는 보리수’는 성립되지 않는다. ‘보리수’의 존재는 낭만적인 상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정답’일지도 모르겠다.

한편 뮐러는 슈베르트가 ‘겨울나그네’를 완성한 1827년에 33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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