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최과장,꿈을 연주하다… 30대 직장인 음반 펴내

  • 입력 2004년 9월 16일 16시 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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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처음 기타를 잡은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부인 형의 실력을 앞질렀고 이후 대학 시절까지 밴드 생활을 하며 음악에 빠져 지냈다. 졸업 후엔 남들처럼 평범한 샐러리맨이 됐지만 음악에 대한 미련은 그대로 간직한 채였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최형배 과장(34). 10일 나온 그의 음반에는 ‘SAL 1집: 스물 하나, 바람 같은 목마름’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작사, 작곡, 편곡, 연주, 기획 등 1인5역을 해냈다. 자신의 음악을 담은 음반을 내고 싶다는 꿈을 이루는 데 10년쯤 걸렸다.

○ 음악과의 인연

예나 지금이나 음악깨나 듣는다 하는 남학생은 한 번쯤 일렉트릭 기타 연주에 도전한다. 랜디 로즈나 리치 블랙모어, 잉위 맘스틴 같은 기타리스트의 연주를 듣다 보면 알 수 없는 욕망이 생긴다. 어렵사리 악보를 구해서 적혀 있는 대로 따라해 보지만 한 박자에 10번 이상 손가락을 움직이는 핑거링과 맞닥뜨리면서 자연스레 꿈은 꺾이고 만다. 학교 공부가 우선이라고 스스로를 다독거린다. 그렇게 사회에 진출해 직장생활을 시작하면 연주는커녕 음악 들을 시간을 내기도 어렵다. 그런데 이 친구는 학창 시절 내내 밴드 생활을 했으면서도 번듯한 대학에, 직장에, 이젠 혼자 힘으로 음반을 냈다.

“부럽다”는 뉘앙스로 운을 떼자 “음악 활동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 때문에 음악 활동에 대한 반대가 워낙 심했다는 것이다. 삼수 끝에 고려대 한문학과에 합격해 서울 생활을 시작했을 때 기뻤던 이유는 단 하나 “이제야 맘 놓고 음악을 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학에서도 록 밴드는 ‘제국주의 음악’을 한다고 찍혀 정식 동아리로 인정해 주지 않았다. 공연을 알리는 벽보가 찢기거나 불타기도 했다.

“그래도 꿋꿋하게 모여서 연습을 했다. ‘크림슨’이라는 밴드였는데 고연전 당시 2만여명 앞에서 응원가를 연주하던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

졸업 후엔 연주 생활을 잠시 접었다. 1997년 아시아나항공에 입사했다가 금호문화재단으로 옮겨 금호현악사중주단을 비롯한 클래식 연주자들의 콘서트를 기획하는 일을 했다. 2002년부터는 박성용 명예회장의 비서로 일하고 있는데 박 명예회장이 클래식계에서 알아주는 마니아이고 한국 문화예술 공익사업인 메세나 운동의 대부로 꼽히니 어쨌거나 음악과의 인연은 끊이지 않고 있는 셈이다.

○ 음반을 내자

최근 1집 음반을 낸 금호아시아나그룹 최형배 과장은 "음악은 내 마음속의 영원한 서부다. 앞으로도 음반을 계속 내고 싶다"고 말한다.-강병기기자

제대로 된 음반을 내는 작업은 엄청난 공이 든다. 비용도, 시간도 만만찮다.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는데 음악을 학창 시절 한때의 추억쯤으로 묻어두는 건 어려웠을까.

그는 “음악은 내 마음속의 영원한 서부”라고 말했다. 영원한 동경의 땅이라는 뜻이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20대가 며칠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됐다고 한다. 20대에 만들어 둔 곡들을 20대가 끝나기 전에 정리해야겠다는 조바심에 녹음을 했다. 이렇게 어설프게 만든 데모 CD를 한 음반 기획자가 듣고는 정식 음반으로 내보라고 권유해 용기를 냈다.

녹음실은 서울 강남에 있는 한 스튜디오. 작업은 한 번에 7시간이 걸리는데 퇴근 후 오후 7시에 시작하면 늘 새벽이었다. 지난해 4월부터 작업을 시작했으니 1년도 넘게 이런 생활을 했다.

그는 “늘 수면 부족에 시달렸지만 탈옥을 꿈꾸는 죄수가 숟가락으로 흙벽을 조금씩 뚫어내는 것 같은 인내심으로 버텼다”며 웃었다.

보컬과 일부 악기 연주에 도움을 받았을 뿐 모든 작업을 사실상 혼자 했다. 기성 가수들 가운데에도 1인5역은 드물다. 팝과 발라드에서 라틴계의 보사노바, 재즈까지 다양한 장르의 곡을 담았다. 모두 한창 방황하던 대학 시절에 쓴 곡들이다.

앨범 제목에 쓴 SAL은 ‘사람의 행동과 운명에 영향을 주는 알 수 없는 기운’이라는 의미의 ‘살(煞)’이다. 그에게 있어 음악 작업은 방황하는 시절에 대한 살풀이와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 에필로그

음반을 내기는 했지만 시장에서 반응이 올지는 미지수다. 음반시장 자체가 워낙 침체돼 있고 음악인으로서 그의 이름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신인 가수의 앨범은 1만장 정도 나가면 대박이라는데 얼마나 팔릴지 궁금하다. 그는 음반을 내면서 직장 생활은 계속하겠다고 말한다. 그래야 음악에 구속되지 않고 오래 음악을 즐길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일상이라는 기차는 느릿느릿 움직이는 것 같아도 한번 타면 좀처럼 내리기 어렵다. 보통 사람들은 기차가 가는대로 실려갈 뿐이다. 그를 만나고 오래 잊고 있었던 꿈을 다시 떠올렸다.

“진짜 평범한 사람이 기타를 좀 친다 싶은 수준까지 되려면 얼마나 걸리느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기타는 한 1년만 하면 된다. 그 대신 매일 열심히 연습해야 한다”는 대답. 이번엔 한발 더 나가 “진짜 평범한 사람도 음반을 낼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음악성 있는 음반을 내는 건 어렵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홍석민기자 sm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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