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구기자의 현장체험]유물발굴/흙에서 역사를 캔다

  • 입력 2004년 9월 2일 16시 3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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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현장에서는 작은 조각이라도 함부로 파내서는 안 된다. 유물이 놓인 위치, 방향, 높이, 주변의 흙 상태까지 모든 것이 당시의 모습을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강병기기자
발굴현장에서는 작은 조각이라도 함부로 파내서는 안 된다. 유물이 놓인 위치, 방향, 높이, 주변의 흙 상태까지 모든 것이 당시의 모습을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강병기기자
《박물관을 간다. 선사시대부터 조선까지…, 즐비한 유물들.

유물에 귀천이 있으랴마는 볼품없는 기와, 토기 조각 앞에서는 발걸음이 빨라지고 화려한 금관이나 인자한 불상 앞에서는 느려지고 만다.

큰 의미가 있거나 아름다운 유물을 보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

그러나 보잘것없는 토기 한 조각에도 엄연히 한 시대를 살아간 흔적이 있다.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찾는 현장. 실로 한 알 한 알 구슬을 꿰어 염주를 만들 듯, 한 조각 한 조각 파편에서 역사를 복원하는 곳.

그렇게 조금씩 힘겹게 만들어진 우리의 역사. 경기 가평군 대성리에서 경기도 문화재단 부설 기전문화재연구원이 진행하고 있는 유적 발굴 작업에 참여했다.》

○ 발굴 작업

기자가 참여한 발굴현장은 원삼국시대(초기 철기시대와 삼국시대 사이·기원전후에서 기원후 3세기까지)로 추정되는 집터와 유적이 대량으로 발견된 곳이다.

아직 발굴 초기단계지만 다량의 토기와 철제 제품, 탄화미, 목탄 등과 함께 집터 모습이 상당히 온전한 모습으로 발굴됐다.

보통 발굴 작업이라면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학술 목적으로 하는 것을 떠올리지만 공사로 인한 유물 훼손을 막기 위해 미리 유물을 발굴하는 구제 발굴이 더 많다.

대성리 현장도 구제 발굴에 해당한다. 인근에서 철도 공사가 곧 있을 예정이기 때문이다. 이곳 작업은 올해 3월 시작해 1년여간 진행될 예정. 현재 유적 위를 덮고 있는 표토를 제거하고 몇 개의 집터 발굴을 끝냈다.

여기서는 40∼50cm 깊이로 길이 약 1km, 폭 40m에 해당하는 지역을 파 내려 갔다.

원하는 지층이 나오면 표면을 꽃삽이나 작은 트라울(시멘트를 바를 때 쓰는 도구와 비슷한 모양)로 반질반질하게 긁어낸다. 각 부분의 흙 색깔로 주거지의 모양을 판별하기 때문. 집이 매몰돼도 집 안에 묻힌 흙과 바깥의 흙은 시간이 지나면 다른 색을 띠게 된다고 한다.

○ 조심 또 조심

먼저 맡은 일은 집터 안의 땅깎기와 흙 퍼나르기. 집터 안의 벽과 땅에서도 흙의 색과 굳기 등을 보면 집안 배치나 용도 등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열심히 흙을 파내는데 김무중 조사 2팀장이 한마디 한다.

“흙 무너뜨리면 퇴출입니다.”

집터 안과 주변에는 여러 개의 토기 조각과 형태를 표시한 선, 구덩이 등이 널려 있다. 흙벽의 결, 색, 토기의 위치, 방향 등은 중요한 조사과정. 토기의 깨지고 버려진 위치, 흙이 무너진 방향을 보고 집안의 공간분할, 가구배치, 사는 방식 등을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부주의로 흙더미를 무너뜨린다든가 발자국을 남기거나 하면 큰 차질을 빚을 수 있다. 이 때문에 돌덩이 하나라도 그 의미를 알기 전에는 함부로 치우거나 버리지 않는다.

어쩌나…. 이미 조금 무너뜨렸는데….

팀장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다.

지름 5m 정도인 원형의 이 집터만도 3∼4주가 걸린 작업이다.

이곳에서 집을 세운 기둥이 거의 나오지 않을 것으로 미뤄 이 부락은 어느 시기에 집단 이주한 것으로 보고 있단다. 기둥을 깎고 만드는 게 어려웠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이사할 때 기둥까지 뽑아 갔다고 한다. 정말 ‘기둥뿌리까지 뽑아간’ 것이다.

두 시간이 넘게 땡볕에 쪼그리고 앉아있었더니 다리가 감각도 없다. 하지만 티를 낼 수도 없다. 이 사람들은 벌써 6개월째 이러고 있었으니….

○ 수천 조각 퍼즐 맞추기

초보 고고학 전공자들이 주로 하는 일중의 하나가 유물 세척이다. 출토된 수많은 돌조각, 토기 조각에 묻은 흙을 일일이 물로 닦아내는 일. 처음에는 재미도 있었지만 그것도 한두개지, 조각이 몇 천개나 되는지 알 수도 없다.

조각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닦으면서 유물의 성격을 알 수 있다.

문양의 특징, 굳기, 붓으로 흙을 떨어내면서 느껴지는 결의 느낌 등등….

주로 초보 전공자들이 맡는 것은 작업이 단순하기 때문이 아니라 유물을 몸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과정이기 때문. 넓은 면은 스펀지로, 옆면은 칫솔로 정성스레 닦아낸다. 토기 조각은 약하기 때문에 잘못하면 면의 문양이 사라질 수 있다.

몇 백개를 닦았을까. 내 이도 이렇게 닦은 적은 없다.

발굴한 유물을 복원하는 작업은 정말 ‘퍼즐 맞추기’다. 퍼즐이야 그림도 있고 개수도 몇 개 안되지만 유물은 몇 천개의 조각 중에서 맞춰야 하니 지난하기가 그지없다.

한참을 닦다가 우스운 생각이 든다. 1000년 후 쯤 핵전쟁 같은 걸로 다른 모든 자료가 사라진 후에 후세 사람들이 서울 이태원이나 유원지 러브호텔 촌을 발굴한다면.

2000년대 초 한반도에는 서구의 식민지가 있었다던가(임나 아메리카설?) 성경의 소돔과 고모라가 이곳이었다는 해석이 나오면 어쩌지….

○ 고고학의 현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꼭 고구려사 때문이 아니더라도 고고학은 우리의 역사를 복원하는 학문이라는 점에서 너무도 중요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부족한 연구비는 말할 것도 없고 사회적 인식도 너무나 낮다. 그래서 후배들에게 흔쾌히 미래를 권할 수 없다.

“지방 도시에서 흙과 땀에 절어 발굴 작업을 하고 있는데 어느 애 엄마가 지나가면서 아이보고 그러더라고요. 너도 공부 안하면 저렇게 된다고요. 웃고 말았죠.”

어느 연구원의 말이다.

아무리 간단한 발굴도 보통 2, 3년은 넘게 걸린다. 대성리만 해도 발굴 1년에 보고서 작성이 2년. 뭐가 나올지 미리 알 수 없으니 일단 시작하면 몇 년은 매달려야 한다.

우리가 박물관에서 대충 보고 ‘훌쩍’ 건너뛰는 볼품없는 유물들도 다 이런 과정을 거친 것이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때문에 나라 안이 온통 난리다. 당장의 왜곡을 바로잡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분야의 연구자들이 의욕을 갖고 매진할 수 있게 해 주는 ‘토대’가 아닐까.

역사학이나, 고고학 같은 분야도 의사 변호사 경영학석사(MBA) 등처럼 사람들이 몰리는 토대가 마련된다면 오늘 같은 상황에 이르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진구기자 sys120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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