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이성형/‘동북아중심論’ 힘 얻으려면

  • 입력 2004년 6월 1일 18시 48분


코멘트
옴팔로스는 델포이 신전에 있는 둥근 돌이다. 그리스인들은 이곳이 세계의 중심이라 믿었다. 해부학에서는 배꼽을 가리킨다. ‘옴팔로스 증후군’은 자신이 사는 곳이 지구의 배꼽이라고 믿는 일종의 자기과신 증세를 말한다. 이 증세는 쉽게 포착되지 않는다. 국민국가가 생긴 이래 각국의 위정자들이 국사, 음악, 지도책에다 이 바이러스를 퍼뜨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북아중심국가’, ‘경제중심’ 같은 단어도 우리 귀에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하지만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사람들은 이를 어떻게 생각할까. 듣자하니, 중국인들이 내심 가장 싫어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한중일 삼국”이라고 한다. 한국이 어떻게 동급에 낄 수 있느냐는 조소어린 시선이 담겨 있다.

▼더 강해지는 美-中-日-러▼

하지만 상관없다. 우리는 천제의 아들이 다스리던 배달국의 겨레이고 금수강산에 살고 있는데. 매일 보는 세계지도의 정중앙에 한반도가 위치해 있지 않은가. 좌측에는 유라시아 대륙이, 우측에는 태평양과 미주대륙이 우리를 보위하고 있으니. 정녕 지구의 중심은 한반도이리라.

정작 아버지 세대의 삶을 생각하면 옴팔로스에 관한 몽상은 금방 사라진다. 필자의 선친은 대동아전쟁 때 포탄공장에 징발되어 사고를 당하셨고, 6·25전쟁 때는 부산에서 온갖 혼란을 겪어야 했다. 어떤 민족이 한 세대 동안 그렇게 혹독한 경험을 했을까. 뵌 적도 없는 할아버지와 증조부 세대의 삶도 고단하긴 마찬가지였으리라. 구한말 한반도는 열강의 각축장이었고, 민란마저 빈발했던 살기 힘든 곳이었다. 아니 역사시대 이래 근 1000번의 외침을 경험했던, 진정 위험하고 허약한 공간이 한반도가 아니었던가. 대륙에서, 해양에서 뭉쳐진 힘은 어김없이 한반도로 넘쳐흘렀고, 그때마다 우리는 유린당했다. 분단의 아픔도 저주스러운 지정학적 역학의 산물이리라.

한반도의 허리는 잘렸지만 지난 50년간은 평화로웠다. 우리의 물질생활은 단군 이래 최고 수준에 달했고, 세계 10대 무역국으로 성장할 만큼 몸도 불었다. 하지만 다시 대륙에서, 바다에서 먹구름이 일고 있다. 해양세력과 유라시아 대륙 사이의 힘 관계가 조정국면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중국의 부상에 따른 미국의 포위 전략이 작동하면서 세계 곳곳이 영향을 받고 있다. 아직 중국이 도광양회(도光養晦·빛을 감추고 때를 기다린다)를 내세우며 고개를 숙이고 있기에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군비경쟁 조짐은 이미 가시화하고 있다.

동북아 강대국들은 모두 현상타파 세력이다. 중국은 대만을 재통합하길 원한다. 일본은 재군비를 통해 대동아전쟁 이전의 보통국가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미국은 역외 균형자로 대중견제의 포위망을 견고하게 구축하고자 한다. 러시아도 시베리아 개발과 남진을 꿈꾼다. 미중일 세 나라는 엄청난 군비를 퍼붓고 있고, 또 퍼부을 전망이다. 이런 강대국들의 각축 속에서 작은 덩치의 한반도는 자주국방과 통일을 꿈꾼다. 꿈이야 막을 수 없지만, 현실은 여전히 견고하다.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열겠다는 정부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한반도의 어떤 왕조도 어떤 정부도 그렇게 웅대한 비전을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남북화해협력, 동북아 물류중심, 에너지 협력, 협력적 자주국방. 어느 하나 버릴 것 없는 훌륭한 말들이다. 하지만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가 우리 각본대로 따라줄까.

▼국제정세 짚어내는 리더십 필요▼

우선 정부와 국회에 숙고하길 권한다. 동북아에서 대외정책이 국내정쟁의 포로가 된 나라는 우리뿐이다. 과거 세력균형은 급속히 깨지고 있고, 대외정세도 급변하고 있다. 모든 역량을 결집해 초당적 외교로 사태를 분석하고 문제를 풀어가야 그나마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리더십은 이럴 때 써먹는 것이다. 고스톱 판의 패가 별로 좋지도 않은 데 판을 키우면 손해만 커질 뿐이다. 동북아중심 같은 거대담론에 집착하기보다는 국제정세를 눈치 빠르게 읽어내며 중요한 곳의 맥을 잡아주는 리더십이 아쉽다.

이성형 세종연구소 객원연구원·국제정치학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