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호 칼럼]‘그네뛰기’와 ‘자리굳히기’

  • 입력 2004년 5월 5일 18시 38분


코멘트
독일은 얼마 전까지 같은 분단국가로서 우리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분단 이전에도 독일은 또 다른 면에서 국제정치적 운명을 우리와 같이하고 있었다. 열강이 각축하는 세력다툼의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다는 외교적 위상이 그것이다. 그랬기에 지난 150년 동안 독일의 국운을 열어간 대정치가는 예외 없이 뛰어난 외교가였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콘라트 아데나워, 빌리 브란트.

1871년 독일 통일을 성취한 비스마르크는 총리가 되기 전 러시아와 프랑스 대사를 역임한 외교관이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슈트레제만은 총리를 그만둔 뒤에도 죽을 때까지 외무장관으로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서독의 첫 총리가 된 아데나워는 상당기간 외무장관을 겸직했다. 브란트도 총리가 되기 전 기민당과의 연립정부에서 외무장관직을 맡았다.

▼서독의 흔들림 없었던 서방정책▼

비스마르크의 통일로 대륙의 한복판에 출현한 강력한 독일 제국은 유럽의 세력균형을 깨고 주변국들을 불안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스마르크는 그러한 불안을 달래고 대륙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때로는 동쪽의 러시아,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때로는 서쪽으로 영국, 이탈리아 등과 지중해협정을 맺음으로써 통일 독일의 안전을 위한 외교적 포진을 튼튼히 했다.

유럽의 동과 서를 오가며 전방위 동맹외교를 펼친 비스마르크의 정책은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도 계승된다. 서부 국경의 안전을 서유럽 제국으로부터 보장받은 로카르노조약을 맺는 한편 동쪽의 소련과 비밀리에 라팔로조약을 체결한 것이 그 사례다.

2차대전의 폐허 위에 ‘라인강의 기적’을 구가한 연방공화국(서독)을 건설한 아데나워는 비스마르크 투의 그 같은 외교전통과 결별한다. 유럽의 동서 사이를 동요하는 소위 ‘그네뛰기 정책’이 독일과 유럽에 재앙을 가져온 비극의 뿌리라고 본 그는 신생 서독을 서방세계에 결정적으로 자리 잡게 하는 ‘서방정책’을 흔들림 없이 밀고 나갔다. 그는 중립을 미끼로 스탈린이 제시한 동서독 통일의 유혹도 뿌리치며 서방 군사동맹(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하고 서유럽 공동체 구축에 전력투구했다. 아데나워의 서독에선 동독과의 통일보다도 서유럽의 통합에 우선순위가 주어진 것이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흔히 오해된 것과는 달리 아데나워의 ‘서방정책’의 부정이 아니라 그를 긍정하는 토대 위에서 펼쳐진 서독 외교의 동유럽으로의 확대였다. 그는 소련 및 동유럽과의 화해를 위해 서방과의 동맹을 소홀히 하거나 배신한 것이 아니다. 독일은 더 이상 유럽의 동서를 오락가락하는 그네뛰기가 아니라 서방세계에 믿음직스럽게, 그러고 되돌릴 수 없게 자리굳히기를 한 것이다.

한국이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바탕으로 서방세계의 일원이 된 것은 중국, 러시아, 일본의 열강 사이를 정처 없이 배회하다 국권을 상실한 구한말의 비극을 몸소 체험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공적이다. 그는 4·19혁명으로 미국의 묵인하에 권좌에서 쫓겨났음에도 동맹국 미국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성명을 이화장에서 초라한 종이에 찍어 신문사에 돌렸던 걸 나는 기억한다. 그의 정치적 ‘유언’이었던 셈이다.

▼위기에 처한 ‘반세기 한미동맹’▼

그러한 미국과의 반세기에 걸친 동맹관계가 지금 동요하고 있다. 일반 국민만이 아니라 정부 여당에서도 중국의 비중을 미국보다 크게 보는 시각이 다수파가 되고 심지어 미국이 북한보다도 한국을 위협하는 국가라고 보는 견해가 퍼져가고 있는 모양이다. 범상한 사태가 아니다.

이승만 이후 한국에서 그래도 국제정치적 감각을 가진 대통령이라면 김대중 전 대통령(DJ)이다. 그뿐 아니라 그는 미국의 도움(생명의 안전까지)을 가장 크게 받은 정치가이기도 하다. 그러한 DJ가 평양에 가서도 통일 후까지 미군의 한반도 주둔의 필요성을 역설했다면서 위기에 처한 최근의 한미관계에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은 웬일일까. 집권당과 젊은이들에게 한미동맹의 필요성을 가장 잘 설득할 수 있는 권위를 지닌 DJ가.

최정호 객원大記者·울산대 석좌교수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