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전엔…]동아일보로 본 4월 넷째주

  • 입력 2004년 4월 18일 19시 08분


코멘트
1949년 한글날 이승만 대통령이 한글 전용과 한글 맞춤법 개정 필요성에 대해 입장을 밝힌 뒤 ‘한글만 쓰자’라는 표어를 부착한 트럭이 서울 거리에 등장했다.   -사진제공 한글학회
1949년 한글날 이승만 대통령이 한글 전용과 한글 맞춤법 개정 필요성에 대해 입장을 밝힌 뒤 ‘한글만 쓰자’라는 표어를 부착한 트럭이 서울 거리에 등장했다. -사진제공 한글학회
▼권력에 의한 개정은 천만부당▼

객년 八월 현행 철자법을 폐지하고 구 철자법을 사용케 하라는 국무총리의 폭탄적 훈령 제八호는 한동안 맹렬한 반대여론을 비등케 하여 국민의 관심을 집중케 한 바 있을 뿐 아니라(…)지난 三월二십七일 대통령이 한글 간소화를 석 달 안에 단행하라는 담화를 발표함으로 여론의 침묵은 마침내 정적을 깨뜨리고 다시금 사회에 파문을 던졌다.

한글학회에서는 한글 간소화를 강행하려 함은 민주정신을 몰각한 처사일 뿐만 아니라 과거 왜정 三십六년 동안의 기나긴 피어린 투쟁을 통하여 이루어진 문화 공탑을 일조에 허물어버리고 비현대적 문자생활로의 전락을 강요한다는 것은 천만부당하다고 지적한 성명서를 발표해 사회에 파문을 던졌다.

▶연재물 리스트로 바로가기

<동아일보 1954년 4월 20일자에서>

▼‘시대역행’ 맞춤법훈령에 반발여론 급등▼

“나랏말ㅱ미 G귁에 달아(…)날로 ㅱ메 DCE ㅱ고져 Fㅱㅱ미니라.”

이렇게 백성의 편리함을 위해 제정된 한글이건만 그 한글 자체의 운명은 광복된 조국에서도 결코 편치 못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1949년 한글날을 맞아 “맞춤법이 괴이하니 개량하는 게 옳다”고 문제를 제기한 것. ‘한글 파동’의 시작이었다. 오랜 망명생활로 새 맞춤법에 적응하지 못한 이 대통령은 자신에게 익숙한 구한말 한글성경의 맞춤법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했고, 국어학계가 이에 반발하면서 논란은 장장 7년간 계속됐다.

이 대통령이 우선 정부만이라도 시행할 것을 지시함으로써 1953년 정부 문서와 교과서, 타자기 등에는 구 맞춤법을 사용하라는 총리 훈령이 내려졌다. 정부는 이어 1954년 ‘표기법 간소화안’을 정식 발표했다. 당시 이선근 문교부장관은 “이 대통령은 세종대왕의 뜻을 재천명한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간소화안대로 하자면 △믿다(信)→밋다 △밖(外)→박 △높다(高)→놉다 △낳다(産)→나타 등으로 써야 할 판이었다. 이에 대해 “간소화안은 일정한 원리가 없어서 학술적 문자가 될 수 없고, 표음인 동시에 표의이고 청각적인 동시에 시각적이어야 하는 문자의 생명을 잃게 된다는 점에서 격분하는 여론이 충천했다”고 ‘한글학회 50년사’는 전한다.

결국 이 대통령은 1955년 9월 “민중이 원하는 대로 하도록 자유에 부치고자 한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민중들이 원한다면…’은 1960년 하야성명의 논법이기도 했다.

‘이 대통령의 고집’은 ‘세종대왕의 뜻’을 따랐던 것일까. 혹시 민주주의 정신과 사회의 발전을 깨닫지 못한 제왕적 대통령의 독선은 아니었을까. 새삼 권력의 금도(襟度)를 생각하게 하는 한 토막 우화(寓話)다.

성동기기자 esprit@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