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인준칼럼]출마자 ‘保育稅’ 내는 국민

  • 입력 2004년 2월 16일 20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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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부총리가 이헌재씨로 바뀐 것은 잘됐다고 생각한다. 김진표씨는 설혹 잠재력은 있을지 몰라도 노무현 정부 첫 경제부총리로 성공하기는 어려웠다. 대통령과 그 코드그룹의 경제관(觀)이 우왕좌왕했고, 속성 출세한 김씨의 정책 리더십이 관료세계 안에서도 쉽게 먹혀들 구조는 아니었다.

김씨에 비해 이씨는 몇 수 위다. 두 사람이 똑같은 말을 하더라도 국내외 시장 참가자들의 주목도가 다를 수밖에 없는 경륜과 내공이 이씨에게는 있다. 그래서 신임 이 부총리의 정책추진력과 미세조정능력에 기대를 걸게 된다.

▼역시 경제는 깃털, 몸통은 총선 ▼

이처럼 이 부총리 등장에는 일단 수긍하면서도, 이 인사가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의 총선전략에서 비롯됐다는 점에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노 대통령이 진정으로 경제에 최우선을 두기 위해 경제팀장을 바꾸려 했다면 교체 시기를 작년 하반기로 앞당겨 새 부총리가 올해 경제운용계획을 미리 세우도록 했어야 정상이다.

김씨가 총선에 출마할 것이라는 ‘근거 있는’ 소문은 이미 몇 달 전부터 나돌았다. 예상대로 노 대통령은 공직자 사퇴시한을 눈앞에 두고 경제부총리를 바꾸었으며, 김씨는 기다렸다는 듯이 열린우리당에 입당했다.

결국 김씨는 지난 몇 달 간 현직 경제부총리이면서 지역구 사정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잠재적 국회의원 후보로 이중생활을 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논리에 충실한 정책추진에 몰두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노동부 장관, 국무조정실장 등 일부 다른 경제 관련 장차관들도 몇 달째 총선 징발의 사정권에 들어 낮과 밤이 다른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랬으니 ‘경제와 민생에 전념하는 정부’라는 강조는 듣기엔 좋아도 현실과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청와대에서는 비서실장부터 하위 행정관까지 20명 안팎이 총선 판으로 내몰렸다. 이들이 국정의 중요한 부분을 맡기에는 함량 미달이어서 쫓겨났다면 그건 별개의 문제다. 가뜩이나 약체인 청와대 진용이 일찌감치 선거바람에 휩싸여 노 정부 초기의 황금 같은 기간을 좌고우면하며 보냈을 것을 생각하니 국민으로서 억울할 따름이다.

요컨대 30명에 가까운 장차관과 청와대 참모들이 여당 후보로 출마하기 위해 정부 내 ‘인큐베이터’ 안에서 국민 세금 먹으며 ‘신분세탁’ 워밍업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행정부 사람들을 총선에 내보내는 것을 국가 인적자원의 재활용이라고 둘러댈지 모르지만, 이들은 이미 국민에게 불성실했을 개연성이 높다.

대통령과 여당의 총선전략이 우선하고, 개각 등 행정부 인사가 이에 종속되는 현실은 물론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16대 총선을 앞둔 2000년 1월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총선용 개각을 했다. 그보다 4년 전인 1996년 15대 총선 직전에는 당시의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가 김영삼 대통령을 향해 이렇게 비난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국사보다 선거운동에 더 몰두하고 있고, 국정의 총본산인 청와대는 특정 정당의 선거운동본부가 되고 있다.”

그렇다고 노 대통령의 총선 올인 행태를 그냥 덮고 갈 수는 없다. 취임 당시 “선거에 나갈 사람은 내각과 청와대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겠다”고 한 말은 분명히 거짓말로 확인됐다. 차라리 그런 말을 꺼내지 않고, 구태정치의 청산이니 진정한 선거혁명이니 하는 말도 입에 담지 않았다면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신뢰에 금이 덜 갔을지 모른다.

▼國政의 구멍 누가 메우나 ▼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이 구호로는 과거 어느 정권도 이루지 못한 정치개혁을 할 것처럼 하면서 실제로는 양김(兩金) 때보다 한 술 더 뜨는 구태를 보이니 정이 더 떨어지는 것이다. 대통령이 정권의 도덕성을 보검(寶劍)인 양 휘두르는 가운데 그 측근들이 검은돈을 수금하고 있었던 사실이 드러났을 때 느낀 것과 유사한 역겨움이다.

노 대통령의 총선 올인 때문에 청와대 곳곳에 구멍이 뚫려 버린 상황도 참으로 안타깝고 답답하다. 이것도 국운(國運)이라면 국운이다. 그렇다고 기왕에 여기까지 온 것을 국민이 당장 되돌릴 방법은 없다. 유권자들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배인준 수석논설위원 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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