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신지호/'새로운 보수'가 나와야 한다

  • 입력 2004년 1월 20일 17시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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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날 동료들과 함께 태백산에 갔다. 현불사에서 하룻밤 신세졌는데 “올 한 해도 어려울 것 같다”는 설송 큰스님의 말씀에 모두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니나 다를까 이튿날 새벽 일출을 보기 위해 산에 오른 우리 일행을 맞아준 것은 매서운 눈보라였다.

참으로 어려운 시기다. 중국이 거침없이 비상하는 속에서 미국 경제가 지난해 3·4분기에 8.3%라는 경이적인 성장률을 기록했고 일본경제 역시 오랜 구조조정의 성과로 ‘잃어버린 10년’의 복합불황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회복 국면에 들어섰건만, 그토록 대외의존도가 높다는 우리 경제의 지난해 성장률은 3%에도 미치지 못했다.

▼침몰하는 대한민국號 ▼

동북아경제의 중심국가가 되겠다고 하지만 표에 눈이 먼 ‘농촌당’ 의원들의 방해로 1조2000억원이라는 과다한 조정비용 제시에도 불구하고 칠레와의 자유무역협정(FTA)조차 통과시키지 못하고 있다. 자주와 동맹의 변증법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마추어들이 ‘결과로서의 자주’가 아니라 ‘의도로서의 자주’를 전가의 보도(寶刀)처럼 휘두르며 외교무대를 희롱하고 있다.

그 뒤를 북한보다 미국이 우리의 안보에 훨씬 더 위협적이라고 생각하는 우중(愚衆)이 떠받치고 있다. 얼마 전 노무현 대통령은 한나라당을 ‘침몰하는 타이태닉호’에 비유했다. 그러나 침몰하는 것은 한나라당만이 아니다. 지금 가라앉고 있는 것은 대한민국호 전체다.

적지 않은 이들이 노 대통령을 실용주의자라 칭한다. 맞는 말이다. 애당초 노 대통령에게 견결히 지켜야 할 좌파사상 같은 것은 없었다. 따라서 친북 좌익 운운하면서 현 정부를 비난하는 것은 군사독재시대의 치졸한 수법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바로 노 대통령의 피아(彼我) 구분법이다. 이는 개발독재시대를 배경으로 형성된 것으로 불의에 맞서는 정의의 투쟁, 독재정권 재벌 언론 미국을 극복 대상으로 보는 인식 등이 그 핵심이다. 대통령이 되어서도 “나는 약자다”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요컨대 노 대통령은 자신이 정권을 잡을 정도로 민주화됐음에도 불구하고 개발독재 잔존세력들이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고 방해하고 있다고 본다.

이러한 피아 구분법은 본인의 실용주의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그 결과 국민통합과 민생개혁이라는 이 시대 절체절명의 과제 실현은 요원해 보인다.

이제 새로운 주체세력이 등장해야 한다. 현 정권의 담당 세력들에게 변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무망한 짓이다. 그들은 지금 권력에 취해 있다. 선악의 이분법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습관에 젖은 이들에게 서로 다름에 대한 인정, 관용을 통해 국민통합을 이뤄 달라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일 수 있다.

그런데 변신을 어렵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정작 바깥에 있다. 바로 우리 사회의 한심한 보수세력이다. 작금의 한국 정치판을 보면 보수(補修)해야 할 보수는 별로 안 보이고 청산해야 할 수구만 득실거리고 있다. 이들 모두가 개발독재의 잔존세력 정도로 인식되니 상대적으로 현 집권세력이 나아 보인다. 그게 바로 ‘닭서리’와 ‘소도둑’이다. 그런데 ‘닭서리’는 ‘소도둑’이 없으면 존재 기반을 상실한다.

▼현정권 권력에 취해 있어 ▼

이처럼 20세기 좌우의 구분을 훌쩍 뛰어넘어 21세기의 새로운 문명표준을 만들어 나아가야 할 오늘날에도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적대적 상호의존’ 관계가 한국의 정치지형을 규정하는 제1 요인이 되고 있다.

새로운 주체세력은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나와야 한다. 그 출발은 20세기적 이분법의 극복이다. 개인의 자유와 창의를 최대한 존중하면서도 시장의 인간화를 깊이 고민해 본 따뜻한 마음, 국익을 위한 실리외교를 펼치면서도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애틋하게 대하는 마음 등이 그 기본 동력이 되어야 한다. 지금 뜻있는 이들이 진정 주목해야 할 것은 총선결과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러한 세력을 잘 육성해 나갈 것인가 하는 점이다.

신지호 서강대 겸임교수·국제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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