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눈]이오키베 마코토/국제분쟁과 美-日관계

  • 입력 2004년 1월 14일 18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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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테러 이후 국제정치의 변동은 정말 격렬하다. 각국의 외교정책도 숨가쁘게 변화하고 있다. 정책을 일부 수정하는 정도로 대응하는 나라가 있는가 하면 대외정책의 기본전략 자체를 바꾸는 나라도 눈에 띈다. 일본은 후자의 전형적인 예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직후인 1946년 제정된 평화헌법 제9조는 전쟁 포기를 명시하고 있다. 1954년 당시 내각은 ‘전쟁 포기’ 조항에 대해 스스로를 지키는 ‘자위(自衛)전쟁’은 포함되지 않으며, 일본이 포기한 것은 ‘침략전쟁’뿐이라는 해석을 내놓았다. 이는 그후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으로 자리잡았다.

일본은 ‘전수(專守·수비에 전념하는 개념)방위’를 원칙으로 삼아 공격용 무기를 보유하지 않았으며 군비를 국민총생산(GNP)의 1% 이내로 억제했다.

1991년 걸프전쟁의 충격이 일본의 평화주의를 흔들었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공격하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에 따라 다국적군이 참전했지만 일본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일본 정부는 세금을 더 거두면서까지 130억달러를 내놓았지만 국제사회는 그리 고마워하지 않았다.

일본 내에서 이는 거품경제의 붕괴와 함께 냉전체제 종식 이후 당한 ‘이중의 패배’로 받아들여졌다.

이때의 ‘패배’는 일본이 ‘유엔 평화유지활동(PKO) 협력법’을 만드는 계기로 작용했다. 당시의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내각은 ‘헌법이 침략전쟁을 금지하고 있지만 유엔 결의 아래 자위대가 평화유지 활동에 참가하는 것은 가능할 뿐 아니라 바람직한 국제 공헌의 방식’이라고 판단했다.

법안 심의과정에서 여론은 찬반으로 나뉘었지만 1993년 캄보디아에서의 PKO 활동이 성공리에 끝나자 일본 국민은 자위대의 PKO 파견을 높이 평가하게 됐다.

일본이 받은 또 다른 충격은 1994년의 북한 핵 위기, 1996년의 대만해협 미사일 위기 등 인접국에 의한 무력행사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일본 정부는 이후 자체 방위력 확충과 미일안보동맹의 강화, 국제안전보장에 대한 참가 등 세 가지 방향에서 활동 영역을 넓혀 왔다.

그리고 9·11테러 이후 변화의 속도는 더욱 빨라지고 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는 테러가 발생한 지 2주일 뒤 미국 뉴욕 현장을 방문해 “일본은 미국과 함께 있다”고 선언했다. 이 발언은 걸프전쟁 때 130억달러를 부담한 것보다 훨씬 더 큰 의미가 있다. 불신이 있을 때는 거액의 지원도 감사의 대상이 안 되지만 신뢰하는 관계라면 작은 협력도 의미를 갖기 마련이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자 자위대는 인도양에서 미군에 대한 급유를 실시했다. 미군과의 공동 군사행동에 신중했던 일본이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에 따라 먼 곳까지 원정을 떠나는 상황으로 발전한 것이다.

세계 각지에서 반전 여론이 높아지는 중에도 고이즈미 총리는 미국의 이라크 공격을 앞장서서 지지했고, 11월 총선거에서 승리하자 자위대 파병을 결정했다. 최대의 동기는 북핵 문제가 중대한 국면으로 치닫고 있는 지금, 미일 우호관계를 손상시키지 않는 것에 머물지 않고 더욱 강화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자위대의 이라크 파병 결과는 앞으로 일본 내에서 국제분쟁에 대한 참여 방식을 다시 한번 재검토하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오키베 마코토 일본 고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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