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만나는 시]이덕규, '우족탕 한 그릇'

  • 입력 2003년 11월 23일 17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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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족탕 진국 위에

별보다 많은 발자국이 둥둥 떠 있네

빈 수레를 끌고

진흙 같은 밤하늘을 떠도는

발자국들.

어디쯤 갔나

파장 무렵

황소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어스러기 수소 한 마리

깡마른 뒷발목이

꿈결인 듯

자꾸 헛발질을 해대네

그 먼길 한 그릇

단숨에 후르륵 떠먹으니

뜨거운 목젖 아래

함부로 밟힌 들꽃 향기 진동하네

-시집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문학동네)중에서

이 세상 어느 오지에 어떤 생명의 발굽에도 밟히지 않은 무심한 흙 한 줌 있을까? 한 번도 생명의 몸을 실어주지 않았던 외진 길바닥 한 뼘쯤 있을까? 이 세상 모든 길이 생명이 지나간 발자국 위에 새로 찍는 발자국임을 알겠네. 앞선 발자국 없인 누구도 한 걸음 새로 떼어놓을 수 없음을 알겠네. 내가 삼키는 것이 발굽이 아니라 수소의 전 생애인 줄을 알겠네. 쿵 하고 쓰러진 어스러기 수소 하나 우리들 주린 목젖 아리랑 고개를 넘어갈 때에, 내 몸 또한 누군가에게 고스란히 돌려주어야 할 길임을 알겠네. 우족탕 한 그릇에 저토록 푸짐한 별자리를 넣어 팔다니 그 식당 나도 들르고 싶네.

반칠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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