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포럼]이인호/맹목적 평등주의의 함정

  • 입력 2003년 11월 9일 19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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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입시 수험생들의 자살과 빚에 쪼들린 가장들의 가족 동반자살이 이제는 충격을 주지도 못할 정도로 빈번해지고 있다. 자살로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의 수가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들의 수를 능가하고 있다.

교육 수준이 낮고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에는 우리에게 없던 일이며 물질적으로 우리보다 훨씬 더 못사는 나라들에서도 볼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 어찌된 셈인가. 이러한 극단적 병리현상의 원인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황폐화된 삶, 극단적 선택 불러 ▼

경제 불황과 노동 착취적 경제구조, 그리고 학벌 숭앙이 원인이라는 설명은 지나치게 단편적이다. 인간 이하의 혹독한 대접을 받고 있는 노동자들도 항의의 폭동을 일으킬망정 가족 동반자살을 하지는 않는다.

자살은 무엇보다도 삶에 대한 정신적 자세와 관계되는 것이다. 자살이 사회 문제로 떠오를 정도로 빈번해진다면 그것은 분명 그 사회에 팽배해 있는 가치관이 잘못돼 있다는 증거다. 삶에 대한 기대와 그것을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과 여건 사이에 건너뛸 수 없는 괴리가 생길 때 사람들은 자살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크게 본다면 우리의 사회적 병리는 물질만능주의적 사회 분위기와 영적 삶의 결핍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좀 더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범주로 좁혀서 본다면 개개인을 자살로 몰고 갈 정도로 심각한 좌절감을 낳게 하는 사상적 오류는 우리의 지성계와 교육계에 팽배해 있는 맹목적 평등주의에 대한 물신숭배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자유와 평등의 이상은 현대사회를 발전시킨 양대 동력이었으며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기본조건이다. 노예제도와 봉건제도를 극복하고 모든 인간이 법 앞에서 평등함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투쟁에 인류는 수백 년을 바쳤으며 그 원칙을 지키려는 투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독재와 계급적 불평등의 횡포로부터 인간의 해방을 가져오는 데에 절대적으로 기여한 자유와 평등의 이상도 법으로 절제된 자유와 법 앞에서의 평등이라는 한계를 넘어 개인적 삶의 모든 영역에까지 적용되는 절대가치인 듯 착각했을 때 그것들은 이미 이상이 아니고 독이 되어버린다. 평등과 유리돼 자유만 강조될 때 그것이 남의 권리에 대한 침탈이 되듯 자유를 무시한 채 평등이 주창될 때 그것은 크나큰 환상이 되어 사회적·개인적 삶을 황폐화시킨다는 얘기다.

역사상 가장 매혹적이면서도 가장 많은 오해와 비극을 낳은 정치적 구호는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주장이다. 모든 인간은 종족 성 종교 계층 신체적 조건이나 지적 능력에 관계없이 누구나 다 같이 소중한 존재이고 평등하게 법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절대 진리다. 그러나 그 말이 모든 사람이 똑같은 능력을 갖고 태어났다거나 모든 면에서 똑같은 권리와 삶의 조건을 누릴 수 있다는 약속이나 보장처럼 잘못 해석됐을 때 빚어지는 비극은 궁극적으로는 자살 아니면 타살로 귀결되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일 뿐 개성이 존중되는 시민사회의 조화로운 삶이 아니다.

‘인간은 평등하다’는 말에 대해 지난 몇 십 년간 우리나라에서 널리 유포된 해석은 불행히도 전자가 아니라 후자가 아니었던가 싶다.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개인별 능력이나 노력의 차이, 적성이나 환경의 차이에 상관없이 아이들은 누구나 똑같이 잘나야 하고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것이 허영심에 사로잡힌 부모들의 요구였다.

▼서로 다른 개성 존중…조화 이뤄야 ▼

경쟁에서 남에게 지고도 인간답게 사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가질 수도 없게 만드는 것은 교사들도 마찬가지여서 학력을 측정해 부족한 것을 보완해주려 하기보다 측정 자체를 원천 봉쇄해 불평등이 드러나는 것을 막겠다는 것이 전교조나 교육위원회의 공식 입장이었다. 그러니 실력 없음이 드디어 드러났을 때 아이들이 죽음의 길을 택하는 것이 놀랄 일인가.

어른과 아이들을 다 같이 자살로 모는 대신 서로 다른 개성이 존중돼 조화를 이룸으로써 사회 전체가 함께 발전하려면 시급하게 극복되어야 할 것이 맹목적 평등주의가 아닌가 한다.

이인호 국제교류재단 이사장·전 러시아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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