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인준 칼럼]"더 할까요, 내려갈까요"

  • 입력 2003년 10월 13일 18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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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고 속아도 또 속는 게 국민일까. 신(神)이라면 더 나쁜 ‘정치 패’와 덜 나쁜 패를 가려낼 수 있을까. 아무튼 더 나쁜 패에 유권자 다수가 넘어가면 나라의 운명과 국민의 팔자가 더 기구해진다. 그나마 덜 나쁜 패를 고르면 조금 덜 피곤하게 살 수도 있다. 나는 오늘의 정치판을 보면서 ‘좋은, 더 좋은’이라는 비교는 할 생각이 없다.

▼노무현流 ‘뒤집기’ 재신임 카드▼

지금 이 나라 국민은 만 8개월도 안된 대통령으로부터 “나 더 할까요, 그만둬 버릴까요”에 답하도록 요구받고 있다. 마라톤이라면 우리 대표선수가 겨우 5km 달리고는 “응원이 시원찮아 더 뛰기 싫다”고 하더라도 그 대회만 망치면 그만이다. 그러나 본인이 아무리 ‘약자’ 시늉을 해도 생각 하나, 말 한마디가 국민에게 일파만파의 영향을 미치는 대통령이 임기 4년여를 남겨 놓고 이러니 난감할 수밖에 없다. 재신임 카드는 바로 이런 허(虛) 찌르기가 아닐까.

대통령이란 5년에 딱 한 번 국민과 ‘직거래’하는 자리다. 선택되고 나면 아니 할 말로 ‘죽으나 사나’ 5년간은 국회를 비롯한 다른 제도들과 힘든 거래를 하면서 국민이 편하게 살도록 신명을 바쳐야 할 사람이 대통령이다. 그럼에도 내 뜻대로 안 된다고 걸핏하면 화를 내다가 급기야 다 때려치우고 ‘법에도 없는’ 직거래를 한 번 더 하자고 한다. “아이고 큰일 나겠다. 대통령 달래야지” 하는 사람도 있고, “역시 잘못 뽑았다. 어떻게 4년을 더 쳐다보나” 하는 사람도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에 대한 지지도가 형편없이 떨어졌음을 시인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수많은 여론조사에 나타난 등돌림의 주된 이유들은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국정의 혼란과 표류가 주로 본인과 자신이 고른 사람들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야당과 일부 신문 때문이라고 되풀이한다. 진짜 그렇게 믿는다면 재신임을 받더라도 달라질 게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국회가 장관 한 사람 해임하라 하고, 감사원장 임명을 거부한 것이 과연 오늘날 국정혼란의 본질일까. 그렇다면 대통령 뜻대로 코드인사(人事)를 하고 정부 시스템 뜯어고쳐 민생이 좋아지고 신나는 나라가 되었나. 대통령이 하고 싶은 말 못한 게 무언가. “이제 끝내겠다”고 다짐한 ‘갈등과 분열의 시대’에 마침표를 찍기는커녕 스스로 갈등을 만들지 않았나. 느닷없이 “재신임을 묻겠다”고 선언함으로써 분열과 대립의 새 판이 벌어지고 있다.

대통령이 ‘노사모’에 친서를 보내고 노사모 쪽에서는 “홍위병 신고합니다” 소리가 터져 나온다. 자신의 당선을 “국민 모두의 위대한 승리”라고 선언했고, 통합의 구심점이 되겠다고 약속했던 대통령은 어디 갔나.

거대 야당에 잘못이 많다면 대통령이 확실하게 여당을 이끌어 내년 총선에서 유권자의 심판을 받으면 될 일이다. 민주주의를 위한 법제도를 솔선해서 지킴으로써, 각 분야가 빚어내는 갈등을 끊을 수 있는 설득력을 쌓아야 할 사람이 대통령이다.

노 대통령은 또 일부 신문에 국정표류의 책임을 돌리지만, KBS를 비롯한 수많은 ‘미디어 응원단’이 열심히 정권을 도와주고 비판적 신문을 난타하는 판국이다. 제대로 민주주의 하는 어느 나라에 허구한 날 신문을 원색적으로 공격하는 데 매달리는 대통령과 정부와 방송이 있는지 나는 모른다. 그만큼 했으면, 80%까지 갔던 지지도가 20%까지 떨어진 요인을 안에서 찾고 만회책을 펴는 게 순리다.

▼'국민 덜 불행해질 선택' 뭘까▼

투표로 재신임을 묻겠다는 발상에 대해서는 국민의 불안심리를 흔들어 ‘노무현 식 10월 유신(維新)’을 꾀하려는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런데도 헌법에 상처를 내면서까지 이런 국민투표가 강행된다면 유권자들은 각자 ‘덜 불행해질 선택’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

재신임 쪽에는 변함없는 충성파 신념파도 있고, 마음은 돌아섰지만 ‘정변(政變)이 불안하고 귀찮다. 별 사람 있겠나. 그냥 4년 더 두고 보자’는 현실안주파도 있을 것이다. 불신임 쪽에는 대안 대망파도 있고 ‘4년은 길다. 지금보다 훨씬 불안할 게 없다. 그동안 실험비용을 많이 날렸지만 이제라도 바꾸는 게 나와 나라의 장래를 위해 손해 덜 보는 길이다’고 판단하는 손절매(損切賣)파도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 속지 않는 선택이 될지 신은 알까. 국민 못해먹겠다, 힘들어서.

수석논설위원 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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