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의 나무]<19>뚝심과 정열로 민족사 복원 신용하 교수

입력 2003-08-25 18:15수정 2009-10-10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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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하 교수는 소년 시절 ‘민족’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후 사회학, 역사학, 경제학 등을 두루 원용하며 ‘한국사회사’라는 학문영역을 구축하고 자주적인 민족사를 복원하는 데 노력해 왔다. -박주일기자
《신용하 한양대 석좌교수(66·서울대 명예교수)는 한국사회사 연구에 독보적 업적을 쌓아 온 학자다. 그는 사회학적 방법론으로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민족운동사 및 근현대 한국사상사를 복원하며 사회과학의 토착화에 힘써왔다. 아울러 국민이 자주 독립의 한국사회사를 올바로 인식하도록 하기 위해 사회적 실천에도 앞장서고 있다.》

● 6·25전쟁때 민족사의 아픔 절감

1937년 제주도에서 태어난 그는 일제의 주민 소개령(疏開令)에 따라 광복 직전 가족과 함께 대전으로 강제 이주 당했고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던 13∼14세에 6·25전쟁을 겪었다. 간신히 되찾은 나라에서 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았고 인천상륙작전 뒤 전선이 불확실해지면서 동족간의 혼란과 살육이 더욱 극심해지는 것을 목격했다. 소년 신용하는 민족사의 이 아픈 기억을 잊을 수 없었다.

‘왜 우리 민족은 남북으로 나뉘어 서로 죽이며 싸워야만 하는가?’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런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그는 결국 이를 풀어보기 위해 ‘민족’ 문제를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1957년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했다. 4·19혁명과 6·3항쟁에 적극 참여했던 것도 이런 문제의식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길은 학문에 있었다.

마침 ‘사회사상사’ 시간에 민족주의에 관한 최문환 교수의 강의를 들으며 감동을 받아 최 교수를 학문적으로 따르기 시작했고 대학원에 진학한 뒤 본격적인 지도를 받으며 사회학자의 길로 들어섰다.

그가 ‘한국사회사’로 연구의 방향을 잡게 된 데는 이상백 교수의 영향도 빼놓을 수 없다. ‘조선시대 신분사’를 주로 연구했던 이 교수는 “사회학도도 역사적 고찰을 잘해야 사회의 심층 원리를 밝힐 수 있다”며 사회과학에서 역사적 고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사회학도의 길을 가던 그는 대학원 1학년 때 지도교수인 최 교수가 경제학과로 자리를 옮기자 그를 따라 대학원 경제학과에 다시 입학해 경제학도의 길을 걷게 됐다. 그는 1964년 ‘한국 자본주의 성립 과정의 연구’란 제목의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경제학과 조교를 거쳐 1965년 28세의 나이에 경제학과 전임강사가 됐다.

이 무렵 그는 당시 사회과학계의 쟁점이 된 ‘중산층 논쟁’에 주요 논객의 한 사람으로 참여해 독점의 폐해를 비판하며 ‘중산층 육성’의 필요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애초부터 민족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던 그는 연구의 방향을 일제강점기의 지주제도 쪽으로 잡아가고 있었다.

1967년 미국 하버드대로 유학을 간 그는 그곳에서 역사학, 경제학, 사회학 등을 폭넓게 공부하며 박사과정을 수료했지만 학위는 서울대에서 받겠다고 결심하고 1970년 귀국했다. ‘자기 사회, 자기 문화, 자기 나라 사람들의 사유를 존중하고 서양의 학문적 성과와 방법론을 이용해 그것을 발전시켜 세계의 학문에 참여해야 세계의 학문도 더 풍부하게 발전시키고 자기가 속한 사회에도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로 돌아왔지만 사실의 구조와 인과관계를 포괄적으로 밝히는 데는 사회학적 접근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판단했고, 1975년 ‘독립협회 사회사상의 사회학적 연구’란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사회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언뜻 보면 사회학 경제학 역사학 등을 헤매고 돌아다닌 듯하지만 사실은 ‘민족’이란 주제에 집중하며 다양한 접근방법을 두루 활용하는 데 심혈을 기울여 온 것이었다.

● 사회학 역사학 경제학 두루 섭렵

그의 연구는 고조선시대부터 21세기에 대한 전망까지 한국사회사 전체를 아우른다.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는 민족의 분단과 통일이었고 분단의 원인을 파고들려면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왜 일본에 강점됐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19세기 우리 민족의 상황에 대해 알아야 했고, 일제 침탈과 항일운동이 어떻게 진행됐는지를 알아야 했다. 일제가 얼마나 철저하게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려 했는지를 밝히려다 보니 일제가 왜곡한 고대사 관련 자료까지 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그의 연구는 근대 민족운동사를 중심으로 고대사부터 현대사까지 종횡무진했고 그 과정에서 일찍부터 자주적 민족사를 밝히려 했던 박은식과 신채호의 역사학을 계승하려 노력했다.

신 교수는 일본의 침탈이 없었다면 조선이 자주적으로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증명하려 했다. 수많은 자료들을 검토하며 이룩한 연구 성과는 독립협회, 갑신정변, 동학과 갑오농민전쟁, 대한제국,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 등에 대한 그의 독자적 학설로 발표돼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시를 쓰겠다던 젊은 시절의 꿈도 접었습니다. 여행을 좋아했지만 취미생활도 다 포기하고 연구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그의 학문적 작업과 직접 연관되는 사회활동까지 포기할 수는 없었다. 1982년 일본의 교과서 왜곡사건으로 전국적인 궐기와 성토가 있은 후 정부가 ‘독립기념관’ 건립을 결정하자 건립기획위원으로 참여했다. 1986년 기념관 창립을 준비하기 위해 독립운동사연구소가 만들어지자 초대 소장을 맡아 독립기념관 건립을 앞장서서 준비했다.

신 교수는 사료를 검토하다가 1904∼1905년 일본이 군사적 목적으로 독도를 침탈해 간 과정을 밝힐 수 있는 자료들을 발견하고는 이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 관련 자료집도 발간했다. 1996년부터 ‘독도학회’와 ‘독도연구보전협회’를 만들어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세상에 알리는 데 직접 나서기도 했다.

2000년에는 그가 ‘근대 최고의 애국자’로 존경하는 백범 김구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백범학술원’을 만들어 2002년 10월 백범기념관을 건립 개관하기까지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요즘도 백범학술원 원장으로 1주일에 2, 3일은 백범기념관에 나가 기념관이 본격적인 궤도에 들어서도록 하는 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

지칠 줄 모르는 그의 연구와 사회활동 이면에는 ‘민족’에 대한 관심과 함께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이 있다.

“유형원 이익 박지원 정약용 등 18세기 말∼19세기 초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저서를 읽으며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려는 열정을 학문으로 승화시켰던 그들의 자세를 본받으려 했습니다. 특히 다산 정약용은 제 학문적 스승이었죠.”

그는 이런 학문과 실천 속에서 한국사회사라는 학문 영역을 구축했고 1980년 ‘한국사회사연구회’(1994년 ‘한국사회사학회’로 확대 개편)를 설립해 그의 학문적 작업을 학계에 확산시켜 나갔다.

● “일부 국사해체론 개탄할 일”

올해 2월 서울대를 정년퇴임한 그는 지금까지 학술논문 249편, 저서 45권을 발표했다. 또한 이미 원고가 완성돼 출간을 기다리고 있는 저서가 6권 더 있다. 이런 초인적인 성과를 낼 수 있었던 데 대해 그는 “한국인의 의식을 억누르고 있는 식민주의 사관을 반드시 극복해서 젊은 세대가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거나 멍에를 지지 않도록 하겠다는 생각으로 쉬지 않고 읽고 썼더니 어느 사이에 그렇게 됐다”며 특유의 굵은 목소리로 너털웃음을 던진다.

이런 뜻을 실천하는 일이 단지 민족애를 앞세운 주장으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사회사학도로서 철저하게 실증적으로 극복해야 하는 작업이었다. 그는 일본인들이 식민주의 사관으로 만들어 놓은 역사에 대해 하나하나 실증적으로 진실을 밝히고, 자료와 사실을 토대로 새로운 민족사를 쓰겠다는 결심을 실천해 나갔다. 하지만 그는 “쉬지 않고 일을 했는데도 아직 1930년대까지밖에 못해 놓았다”며 정년퇴임을 한 지금도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앞으로는 40년대 이후의 사회사에 대해 모아 놓은 자료들을 검토하며 연구를 계속할 생각이다. 내년 초까지 ‘일제강점기 한국민족사’(전 3권)를 마무리 지으면 ‘한국근대사’도 써 볼 작정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꼭 해 놓고 싶은 일이 있다. 더 늙기 전에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에 대한 주해서와 ‘백범평전’을 총력을 기울여 쓰겠다는 것이다. 그의 학문적 작업은 결국 “우리 근대사에서 자주독립의 정신을 구현하고 민족과 세계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면서 활동했던 분들을 통해 다음 세대가 계몽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신 교수는 김구 선생이야말로 이런 의미에서 가장 모범이 되는 인물이라고 본다.

“일부 지식인들이 역사의 엄정한 사실을 무시하고 무책임하게 국사해체론과 민족해체론을 주장하고 있다”며 최근의 세태를 우려하는 신 교수는 이번 주에도 서울대 한양대 백범학술원을 오가며 소년 시절 결심했던 ‘민족 연구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다.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실사구시 사회학이 필요한 이유 ▼

한국사회학은 ‘실사구시’의 사회학이 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일찍이 실학자들이 주장했던 ‘실사구시지학(實事求是之學)’을 현대적 형태로 재창조하여 계승 발전시키는 것의 중요성을 저는 강조하고자 합니다. 실사구시의 학문이란 곧 사회적 사실이 이론보다도 선행한다는 점을 겸허히 받아들여서 사실에 의거하여 이론을 정립하고 사실에 비추어 이론의 진위와 적합도를 판별하는 학문을 말합니다. 사회적 사실은 무한하고 다양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인데 반하여 이론은 유한한 것이고 제한된 것입니다. 사회학뿐만 아니라 어떠한 학문의 이론도 인류사회와 인류역사의 전 과정을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사회적 사실의 무한성과 이론의 불완전성을 인식하고 ‘실사구시’의 정신을 갖추는 일이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민족의 형성과 민족사회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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