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장소원/‘우리말 받아쓰기 대회’ 열자

  • 입력 2003년 8월 12일 18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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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은 중국의 부상에 대비해야 한다며….” 얼마 전 출근길에서 듣게 된 라디오 뉴스의 일부분이다. 난 순간적으로 ‘중국이 무슨 부상을 당하나?’ 하고 착각을 했다. 물론 곧이어 ‘아하, 중국이 아시아에서 크게 떠오를 것을 대비하자는 말이군’ 하고 납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혼동이 일어났던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그 아나운서는 첫 음절이 긴 소리인 ‘부상(浮上)’이라는 단어를 짧게 발음했고, 나는 그 단어를 단음으로 시작하는 ‘부상(負傷)’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아나운서도 발음 長短 구분못해▼

지역에 따라, 또 연령에 따라 음의 장단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이들의 잘못이라기보다 어디에서도 그 차이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 역시 학창시절에 국어의 소릿값에 대해 제대로 배운 기억이 없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넓다’를 읽을 때 왜 그 발음이 ‘널브다’가 아니고 ‘널따’가 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온갖 정성을 기울여 리을(ㄹ)과 비읍(ㅂ) 그리고 디귿(ㄷ)을 모두 발음해 보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이처럼 국어의 발음을 주먹구구로 익힌 내게 ‘그림자밟기’ 놀이는 꽤 오랫동안 ‘그림자밥끼’가 아니라 ‘그림자발끼’로 인식됐다.

요즈음 방송은 잘못된 국어 사용을 묵인해주다 못해 오히려 조장하고 있는 느낌이다. 청소년들에게 우상의 존재가 된 연예인들은 몸 바쳐 국어의 오용에 힘쓰기로 모종의 합의라도 한 듯이 보인다. 또한 화면마다 넘쳐나는 자막처리는 텔레비전을 보는 사람들의 신경을 긁는다. 그나마 방송이 끝날 때까지 자막을 한 번도 틀리지 않고 올바르게 내보내는 프로그램은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 정치인들 역시 표준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거의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데 있어 ‘지역 사투리’가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어떤 나라에서는 지나치게 사투리를 많이 쓰는 정치인은 공영방송에 출연할 수 없도록 규제하는 법이 있을 정도다. 만약 이 법이 한국에 존재한다면 끝까지 살아남을 정치인은 과연 몇이나 될지 궁금하다.

우리 국민 가운데 아주 평범한 글 한 쪽이나마 틀리지 않고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한 문단의 글을 맞춤법의 실수 없이 받아쓸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단 몇 분 동안이라도 어법의 실수 없이 조리 있게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강의를 하다보면 서울대 학생들도 발음이나 어법, 문법과 관련된 실수를 빈번히 저지르고 있다.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면 대부분 “우리말은 너무 어려워요. 뜻만 통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하는 원망 어린 대답이 돌아오곤 한다. 이것은 비단 서울대 학생들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한 나라의 지성인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학생들조차 자신들의 국어를 어렵다고 생각하고, 올바로 읽고 쓰지 못하는 이런 현실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잘못된 국어교육 바로잡아야▼

1차적인 원인은 과거 우리의 잘못된 국어 교육에 있다. 가르침 없이 정확한 발음, 적절한 어휘 선택, 논리적인 문장 구성을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초등학교부터 국어시간에 읽기, 쓰기, 듣기, 말하기를 나누어 가르친다. 그러나 과거엔 머리만 사용하는 읽기와 쓰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제는 제대로 국어를 배우지 못한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우리말 재교육을 검토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정확한 국어 사용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의식교육이라도 이루어져야 하는데, 우리의 현실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언어는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우리 생각의 깊이와 폭이 달라진다는 것을 뜻한다. 민족적 자부심이 대단하기로 유명한 프랑스 국민에게 오래 전부터 큰 관심을 모아온 전국적인 행사는 뜻밖에도 ‘받아쓰기 경시대회’이다. 우리도 ‘우리말 받아쓰기’ 대회를 열어보는 것은 어떨까. 민족적 긍지는 국어를 사랑하고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장소원 서울대 교수·국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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