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삶]장영란/벼의 목숨, 나의 목숨

  • 입력 2003년 8월 1일 18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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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생활을 접고 시골에서 살아보려는 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얼마 전까지 농촌에서 도시로 떠나던 흐름이 바뀌어, 거꾸로 도시를 떠나려는 사람이 늘고 있는 것이다. 전국 곳곳에 귀농학교가 열리고, 그분들과 만날 기회가 생기고 있다. 젊은 처녀, 어린 아기를 둔 부부, 머리 희끗한 어르신….

어렵다 어렵다 해도 우리 사회에 물질은 넘친다. 그렇기에 어디 가 밥 먹고 살 데 없어 귀농하는 게 아니고, 자연에서 자유롭게 사는 게 더 행복하겠기에 그 길을 찾는 것이다.

물론 농사해서 돈 벌기는 참 어렵다. 1998년 우리가 처음 전북 무주군의 이 산간마을로 들어왔을 때, 마을 어른들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걱정해주었다. 2년 뒤, 우리가 이곳에 집을 짓는다고 하니 진심으로 말렸다. 그 돈 있으면 모아놓았다가 빨리 도시로 나가라고, 3년을 못 살고 떠날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마을에 온 지 벌써 6년째. 우리는 시골생활에 점점 더 푹 빠져 편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시골에서 살아보니 농사를 짓는다는 건 사람이 자신을 되찾는 지름길임을 깨닫게 된다. 그동안 논밭에 씨 뿌려 농산물을 거두었다. 그게 눈에 보이는 소득일 것이다. 그러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눈에 보이는 소득보다 더 큰 소득이 따로 있었다. 바로 활기찬 몸과 마음이었다. 몸과 마음이 건강하니 살 의욕도 솟아났다.

도시에서 태어나 줄곧 거기서 살다가 처음 농사를 지으려니 힘들기도 했다. 자연의 흐름을 몰라 헛고생도 많이 했다. 그래도 봄이 오면 희망을 심고 가꾸며 조금씩 자연의 흐름이 보였고, 곡식이 어찌 자라는지도 알게 됐다. 그러면서 ‘벼도 목숨, 나도 목숨’, 목숨을 가꾸는 마음으로 일하니 자연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많아졌다.

장마 끝에 오랜만에 하늘이 열리고 해가 환히 비친다. 긴 장마에도 올벼(조생종·일찍 이삭이 나오는 벼) 논에 이삭이 패어 논으로 간다. 논농사 지은 지 6년이 지나도록 벼꽃을 제대로 못 보았다. 하긴 농사짓기 전엔 벼도 꽃을 피우는지조차 몰랐으니…. 그동안 벼 이삭에 흰 솜털 같이 달린 게 벼꽃인 줄 알았더니 그건 벼꽃이 진 모습이란다. 그렇다면 오늘은 진짜 벼꽃이 피는 모습을 보리라.

논둑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벼꽃이 그리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한동안 벼 이삭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만 보인다. 보고픈 얼굴 기다리듯 저만큼 한번 보고, 다시 눈앞의 이삭을 보고. 어느 순간 벼 이삭에 달린 수많은 알갱이 가운데 하나, 껍질이 반으로 벌어지는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 그 작은 껍질 사이로 하얀 수술이 위로 올라온다. 암술은 보일 듯 말듯 껍질 속에 있다. 수술이 밖으로 나와 하나하나 천천히 늘어진다. 자기 할 일을 마친 거다. 수술이 다 늘어지니 벌어졌던 껍질이 닫힌다. 얼마나 걸렸을까. 한 두 시간쯤 되나, 그 사이 벼꽃이 피었다 진 거다.

우리가 먹는 쌀 한톨 한톨, 이렇게 암술이 꽃가루를 만나 수정을 해 생긴다. 사람 목숨이 태어나는 원리와 같다. 쌀 한톨이 완전한 목숨으로, 그걸 심으면 수백개의 볍씨로 자란다. 제대로 수정이 되어 잘 영글면 바로 쌀이 되고, 그러지 않으면 쭉정이가 되고 만다. 그러니 벼꽃 하나는 자기 온힘을 다해 꽃을 피우고 수정을 하겠지. 우리 논에 벼 포기가 얼마나 많나. 벼마다 이삭이 여러 개, 이삭마다 수십개의 알갱이가 저마다 영글어 우리 밥이 되는 것이다.

벼꽃을 보니, 밥 먹고 사는 내 목숨이 얼마나 소중한지. 이 길고 긴 장마에 도열병을 이기고 벼꽃을 피운 벼들이 어찌나 기특한지. 이 벼들 덕에 내가 행복하다. 살아갈 힘을 얻는다.

▼약력 ▼

1959년 서울 출생. 1981년 서강대 국문과 졸업. 한국글쓰기연구회 회원. 1998년 전북 무주군으로 귀농해 논밭 2000평에 네 식구의 자급자족을 위한 농사를 짓고 있다. 16세의 딸과 9세 아들을 교사 출신인 남편과 함께 직접 교육시키고 있다.

장영란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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