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삶]안철환/흙에게 ‘잡초’란 없습니다

  • 입력 2003년 7월 4일 18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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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를 지은 지 3년쯤 된 지난해부터 우리 밭에 지렁이가 급격히 늘었다. 새끼손가락 두께에 길이 30cm는 되는 지렁이가 뱀처럼 기어다닌다. 흙이 비약적으로 살아난 것이다. 거무스름해진 흙의 색깔도 좋고 무엇보다 촉감이 좋다. 부들부들해진 것이 이제는 쇠스랑질도 어렵지 않다. 그동안 농약이나 화학비료는커녕 흙을 갈아엎는 작업도 하지 않고 잡초를 베어 흙에다 깔아준 결과였다.

그런데 문제는 지렁이를 먹으려고 덩달아 늘어난 두더지였다. 두더지가 온통 땅굴을 파서 밭을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특히 모종 싹이 갓 튼 비닐온상을 땅 속에서 휘젓고 다니면 모종농사는 실패하고 만다. 그러니 두더지란 놈이 참으로 미워졌다. 그렇다고 쥐약을 갖다 놓을 수도 없고, 대책 없이 지켜보고 있어야만 했다.

두더지만큼 미운 놈이 거세미라는 애벌레다. 풍뎅이 종류인데 연필두께 만하고 까만색이라 보기에도 징그럽다. 이놈들은 밤이면 흙에서 나와 고추나 오이 같은 여린 모종의 목을 잘라버린다. 굼벵이처럼 볏짚을 좋아해 볏짚으로 고추밭을 덮었던 재작년에는 심어놓은 고추의 20% 정도를 이놈들이 잘라버렸다. 마을 아저씨에게 말했더니 거세미만 죽이는 농약이 있다며 사다가 뿌리라는데 그럴 수는 없었다.

내 마음을 알아줘서일까. 올해 들어서는 두더지도, 거세미도 그렇게 극성스럽지 않다. 해충도 대책을 세워야 할 만큼 피해를 주지는 않았다.

농사를 시작하기 전 어느 귀농학교 강사의 농장을 방문했더니 두더지 피해를 말하면서도 “그놈들도 먹고 살아야지, 어쩌겠어요” 했던 말이 기억난다. 그는 거세미가 잘라먹은 자리에다 들깨를 심어 들깨 향으로 다른 해충을 쫓는 방법도 일러줬다. 해충은 거미나 무당벌레 같은 익충(益蟲)이 해결해줄 것을 기대할 뿐 별 대책을 세우지 않는다고 했다.

흙이 살아나니 해충이란 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리석은 인간이 자기 욕심으로 만들어낸 말일 뿐이다. 문명과 인간의 욕심에 따르자면 불필요한 것들이 많지만 살아있는 자연에선 어디 불필요한 게 있겠는가.

잡초도 마찬가지다. ‘잡초는 없다’고 한 유명 교수님의 말씀도 있지만 정확히 말하면 해초(害草)는 없다는 말이다. 밭 잡초 중에는 명아주라는 풀이 있다. 번식력이 대단하지만 생명력도 강해 나무처럼 크고 두껍게 자란다. 그래서 명아주는 옛날부터 노인들 지팡이 만드는 재료로 최고였다. 풀이라 가볍고 질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팡이를 만들기 위해 명아주를 재배하는 밭에서 고추가 절로 나면 거꾸로 고추가 잡초가 된다. 그러니 잡초는 없는 것이다.

잡초 중 대표적인 해초로는 뚝새풀과 바랭이를 꼽는다. 잔뿌리가 많아 잘 뽑히지도 않고 뽑은 채 그 자리에 두면 다시 뿌리를 내려 부활하는 놈들이다. 특히 바랭이란 놈은 넝쿨로 번식해 금방 밭을 점령해버리는데, 이 놈 때문에 고생깨나 했던 한 초보 귀농자는 묘안으로 개울가 둑이 무너지지 않도록 바랭이를 잔뜩 옮겨 심었다고 한다. 정성스럽게 물까지 줘가면서 심었는데 참 희한하게도 며칠 지나니 죄다 죽어버렸다는 것이다. 잡초였을 때는 그토록 질겼던 생명력이 작물로 취급받자 별안간 사그라졌던 것이다.

여하튼 대표적인 해초라는 풀들은 먹지 못하고 쓸 데도 없는 데다 잔뿌리가 많아 잘 죽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잔뿌리가 죽은 흙을 살리는 데 큰 효과가 있다고 한다. 뽑아보면 금방 실감할 수 있다. 우선 잔뿌리에 잔뜩 붙잡혀 있는 흙은 아주 부드럽다. 즉 잔뿌리가 흙을 부드럽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뿌리는 다양한 미생물과 벌레들이 서식하기 좋은 곳이 된다. 적절한 습기가 있는 데다 먹이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 해충이나 해초가 어디 있겠는가. 다만 인간의 욕심이 있을 뿐….

1962년 생. 서강대 물리학과 중퇴. 소나무출판사 기획실장을 거쳐 지금은 ㈔전국귀농운동본부에서 농사 및 생태 관련 출판 일을 맡고 있다. 경기 안산시에서 밭 두 마지기를 갈면서 채소와 잡곡 농사를 짓고 있다.

안철환 전국귀농운동본부 출판기획실장·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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