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3>황주리 화가

  • 입력 2003년 5월 13일 18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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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벌써 14년이 되었다. 계절이 바뀌어 산소를 찾을 때 마다 우리 형제와 어머니는 이런저런 소원을 이루게 해달라고 아버지께 기도를 드린다. 영화제작을 하는 동생이 만든 영화가 대박이 터지기를, 어머니의 건강을, 화가로서의 나의 행운을 아버지께 빌면서 문득 쓸쓸한 생각이 든다. 생각만 하면 눈물이 주룩 흐르던 그리운 내 아버지가 세월이 흘러 이제는 자식들이 소원을 비는 가장 강력한 조상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마치 그 옛날 아버지께 타 쓰던 용돈처럼 이제 우리는 또 저세상에 계신 아버지께 영혼의 용돈을 달라고 졸라대는 건 아닐까. 살아생전 용돈 한 번 드려보지 못했다. 남은 시간이 많은 줄 알았다. 암으로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지의 죽음은 나에게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었던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었다.

아버지는 6·25전쟁 당시 종군작가단의 일원이었고 전쟁 직후 신태양사라는 출판사를 설립하여 신태양, 여상, 명랑, 실화, 소설공원, 흑막, 내막 등의 잡지와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출간했던 우리나라 출판계에 주요한 출판인이셨다. 1988년 겨울, 긴 시간 비행기를 타고 미국 뉴욕에 살고 있는 딸을 보러 오신 아버지는 자꾸만 돌아가자고 하셨다. 이곳이 어디 사람 살 곳인가. 거지들과 꽃가루처럼 흩날리는 거리의 쓰레기들, 낡은 지하철역에서 풍겨오는 오물냄새…. 아버지는 시집을 잘못 보낸, 하나밖에 없는 딸을 친정으로 데려가듯 자꾸만 돌아가자고 하셨다. 그리고 그때가 아버지를 본 마지막 겨울이었다.

책갈피에 꽂아둔 채 내가 늘 들여다보는 아버지의 마흔살 무렵 흑백사진. -사진제공 황주리씨

어릴 적 식사시간에 밥 먹기가 싫어서 숟가락으로 떡을 치고 있으면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다 먹지 말고 남겨라. 한 숟갈이라도 배부르면 다 먹지 말고 남기는 게 건강에 좋다.” 그렇듯 남들이 다 한다고 해서 내키지 않는 결혼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되었다.

아버지는 농담조로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나를 닮아 이기적이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 엄마를 닮았다면 벌써 어떤 놈한테 끌려가서 고생하고 있을 텐데. 그렇게 씩씩하게 살면서 그림 열심히 그리는 내 딸이 자랑스럽단다.” 아버지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내가 좋아하는 오래된 흑백사진 속에서 마흔 살 내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실 것만 같다. 그렇고 말고….

황주리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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